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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영화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의 원작자인 정유정의 소설 ‘28’(2013)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 ‘28’은 서울과 인접한 인구 29만의 가상 도시인 ‘화양시’에 급성 출혈열 증세를 보이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마침내 봉쇄된 도시에서 28일 동안 갖가지 인간 군상들이 보이는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 전염병 아포칼립스(aporcalypse)물이다.(청도군에 화양읍이 있으나 실제로는 수도권에 위치한 의정부를 모델로 했다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
마치 코로나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듯 전염병의 발발에서 대응에 대한 사람들의 상이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상황과 너무 유사한 점이 많다. 영화 ‘컨테이젼’은 박쥐가 감염원이지만 소설 ‘28’은 개가 감염원이고 전염병에 걸리면 치사율 100%다. ‘컨테이젼’이 미국의 감염병 사례를 다룬 영화라면 ‘감기’는 한국에서 감염병 발발과 대응을 잘 묘사한 영화다.
소설 ‘28’에는 5명의 주요 인물과 1마리의 개가 등장한다.
한기준은 소방관이다. 링고라는 개와 가장 먼저 마주친 인물이며 그의 아이와 아내가 개들에게 물려 사망하자 이 일이 링고가 벌인 짓이라며 엄청난 증오심을 품게 된다. 나중에 죽이려 하지만 서재형이라는 인물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서재형은 수의사다. 눈보라 치는 개 썰매 경주에 참여했다가 본인들의 개를 모두 사고로 잃어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길거리를 걷다가 철봉에 매달려 매질 학대를 당하던 개 ‘쿠키’를 구해주다가 박동해라는 인물과 관계가 틀어진다.
김윤주는 기자다. 서재형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작성해 서로 앙숙이 되는가 싶더니 그에 대한 연정을 품는다. 나중에 전염병의 숙주가 견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개를 모두 죽여버리는데, 이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박동해는 장애가 있다. 서재형이 구해준 학대 당하던 개, 그 개를 학대하던 이이고 나중에는 다른 개들도 서슴없이 죽이는 인물이다.
노수진은 간호사다. 지금 코로나 환자들을 보살펴주는 사람들처럼, 소설 속 전염병 환자들을 보살피는 일을 한다.
마지막으로 과거 투견이었던 링고. 소설은 특이하게도 링고라는 개의 시점에서도 전개되는데,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돼지들을 TV 화면으로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의 인식이 계기가 된 것 같다.
전염병이라는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도시봉쇄, 살인, 강간, 사랑, 죽음 그리고 인간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고 또 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습들을 이 소설은 다루고 있다. 28일 동안 처절한 죽음 가운데에서 살아나고자 버티는 사람과 희생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피어나는 구원의 의미와 재난의 리얼리티를 이 소설은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 ‘종의 기원’과 더불어 ‘28’은 그녀의 싸이코패스 3부작의 중간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정유정의 작품들에서 인간이 악한 존재임이 강조되어 인간의 삶의 의미가 다소 허무주의적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면, 비교적 최근작 ‘진이, 지니’에서는 인간이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과 공감하며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 죽음과 삶의 실존적 의미를 드러낸다.
결국 희망이다. 희망이 감염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희망과 연대만이 이 절망적인 삶을 구해줄 수 있는 심폐소생술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한가라는 물음이 울음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은 어디까지 선한 가라는 물음이 끝내 웃음으로 귀결되기 바란다.
작가의 마지막 전언이 우리가 오래도록 가슴에 품어야 할 금언이었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에 선행을 베풀기는 쉽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정말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증명하는 것은, 참혹하고 비통한 시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숨 쉬는 인간성‘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p. 492
사족: 정유정은 간호사 출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소설로 썼다. 그녀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 타고난 문학적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쓰면서 그러한 능력이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쓰고 성찰하는 일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의미이고 구원의 방식이라고 이 소설 소개를 계기로 힘주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