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원칙에 따랐다면 한민족의 성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발령을 받아 부임도 하기 전에 전라수군 좌수사로 파격 승진한다. 선조의 파격 인사에 대간들은 쌍수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고 이순신의 승진을 밀어붙였다.
조일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제공자이자 일등 방조자였던 선조가 유일하게 잘한 일로 평가받는 순간이다. 만약 선조가 대간의 반대에 굴복해 인사 원칙에 따라 이순신의 좌수사 임명을 번복했다면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변칙이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순신의 변칙은 전략에서도 빛났다. 당시 조선군 수뇌부는 일본이 섬나라라는 객관적 사실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육군보다는 수군이 강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졌다. 하지만 일본의 전국시대는 육전(陸戰)이 지배했다. 실상은 말이 수군이지 사실상 해적에 불과했고, 병력과 물자 수송이 주임무였다. 조선군 수뇌부가 육전에 집착할 때 이순신 장군은 홀로 적의 수륙병진작전 봉쇄전략을 짰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이 사실상 육군이고, 함선 위에서 단병전에 능하다는 점에 착안해 포격전을 구상했다. 장거리 포격전으로 적을 섬멸하겠다는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적의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상의 전술이었다. 이순신은 고리타분한 원칙을 위한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선택의 고수였던 셈이다.
요즘 대선 경선에서 ‘원칙’을 내세우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얼마나 원칙에 맞게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원칙론도 상황에 따라 변화해 온 변칙이 아닐까 싶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