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설령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를 안다고 해도 제 삶이 그렇지 않다면 그런 글이 나올 리 없고요. 그냥 저는 제가 따뜻하고 넓고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작가의 말)
수많은 젊은 생명이 산화한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한 달 내내 정지아의 소설들, 그 소설들이 남긴 잔영들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싸웠던 지리산, 어머니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백아산에서 한 글자씩 따와 ‘지아’란 이름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다. 시대의 진실을 담았지만 20대 초반에 발표해서 문학성은 떨어진다고 스스로 자평한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은 이적표현물의 멍에를 달고 압수되었으나 2005년 복간되었다.
이런 이력에서 보듯 어린 시절부터 ‘빨치산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그녀의 삶은 상처와 슬픔의 연속이었다.(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 친구에게서 “빨갱이의 딸 주제에…”라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문학으로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 장편소설을 펴낸 후 예리한 문학성을 가미해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어 등단했다.(당시 진보진영을 얕잡아보는 경향신문에 대항하고 싶어 일부러 조선일보에 응모했다고 한다.)
‘행복’(창비, 2004), ‘봄빛’(창비, 2008), ‘숲의 대화’(은행나무, 2013), ‘자본주의의 적’(창비, 2021) 등 4권의 소설집을 펴내며 리얼리스트로서의 핍진한 문장과 소외된 삶의 따뜻한 묘사력이 높이 평가되어 이효석 문학상, 한무숙 문학상, 오늘의 소설상, 김유정 문학상, 심훈 문학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문단의 주요 작가로 성장했다.
글의 서두에 그녀의 작품 이력을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불우하고 외롭고 쓸쓸했을 삶을 얼마나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세공했는지를 작품으로 만나길 권하고 싶어서이다.
자신에게 이름을 준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남은 아흔아홉 노모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 ‘검은 방’이다. 정지아 작가의 ‘검은 방’은 ‘사소한 인생’에 불멸성을 입혀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뛸 수’ 있기를 염원하는 세상 모든 사소한 인생들의 소망이기도하다.
소설은 격변의 한반도 역사 현장에 온 몸으로 뛰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아흔아홉살’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검은 방’은 ‘한 평생의 기억이 살타래처럼 풀려나온, 시간이 입체로 고여 있는 공간이자 그녀의 우주’다.
그녀는 자신의 우주가 된 건너편 방의 딸을 더 잘 보기 위해 방에 불을 켜지 않는다. 그녀의 방이 항상 검은 이유다. 빨치산의 딸로 각인된 작가가 드디어 이렇게 포용하며 웅숭깊은 세계를 지향해가는 것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가야할 진실에의 길, 화해와 승화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한국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매년 우수한 작품을 영문과 한글로 함께 펴내는 K-픽션 시리즈 2020년작으로 선정돼 2020년 1월 선을 보였다.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2020년에는 경원선 백마고지역 앞에 있는 격전지 소이산에 다녀왔고, 71주년 되는 올해는 연천 유엔군화장장에 다녀왔다. 두 곳에서 모두 꽃다운 젊음의 희생에 한없는 존경의 추념을 올렸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