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은 연산군의 임사홍과 더불어 악명을 떨친 대표적인 조선의 간신이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이 낳은 출세의 화신이다. 그는 원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로 관직에 나서 광해군 시절 병조좌랑까지 올랐다. 김자점은 광해군이 기획한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관직을 포기하고, 이귀·최명길 등과 함께 반정을 꾸몄다.
하늘의 도움이랄까? 김자점은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1등 공신 반열에 올랐다. 실은 반정 당시의 공적보다 권력 초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상납한 덕분이었다. 김자점은 김상궁의 위세를 등에 업고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회피해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치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처형의 위기에 빠졌으나 무능한 군주 인조는 그를 총애해 기껏 일년간 위리안치에 처했다가 다시 중용한다. 정계에 복귀한 김자점은 1644년 발생한 심기원의 역모사건 이후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서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다.
김자점은 무능하지만 권력집착증 환자인 인조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다. 인조가 며느리 강빈을 경계하는 뜻을 알아채고 강빈의 처형을 주도한다. 또한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시킴으로써 외척의 권세를 더 누리게 됐다.
김자점은 병자호란의 원수 청에게 빌붙어 호가호위 무소불위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뒷배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은 권력의 끈을 놓치게 된다. 마침 효종과 송시열 등이 북벌론을 주도하자 이를 청에게 알렸다. 결국 이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곧바로 광양으로 유배됐고, 후일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능지처참으로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온 나라가 대장동 의혹으로 요동치고 있고, 우리지역도 ‘제2의 대장동’이 될 수도 있다는 각종 의혹으로 혼돈의 늪에 빠졌다. 권력의 부패는 무능한 권력자와 김자점과 같은 간신들이 주인공이고 범인이다. 역사의 교훈은 권력자와 간신의 현란한 혓바닥에 의해 실종된 모양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