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숫자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는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13척이 133척의 일본 수군을 궤멸시켰다. 무려 10배 가까운 수적 열세를 극복한 민족사의 쾌거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한민족은 부끄러운 역사는 애써 외면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우리도 임진왜란 초기 수적 우세를 믿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다가 수만명이 몰살당한 치욕의 역사가 있다. 바로 용인전투다.
용인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음력 6월5일에서 6월6일 사이에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자락 인근에서 펼쳐졌던 치욕의 역사다. 당시 일본군은 선조의 한양 포기라는 결정적인 협조(?)로 파죽지세로 북진 중이었다. 일본군은 빠른 진격에도 불구하고 후방이 노출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발생했다.
조선군도 이를 간파하고 이광, 곽영, 윤선각, 김수, 권율 등과 같은 장수들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삼남의 대군과 패잔병들을 끌어모아 한양 수복작전에 나섰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어림잡아 5~8만에 이르는 대군이 모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지휘관의 역량도 지휘체계도 엉망이었다. 병졸들도 오합지졸이었고, 오로지 기세만 등등했다. 오로지 한양 수복이라는 전투 목표만 뚜렷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반면 일본군은 고작 1600여명에 불과했다. 적장 와키자카 야스히로는 지략을 갖춘 맹장이었고, 병사들도 백전노장이 대다수였다. 결국 일본군의 기습과 조총 화력, 기마병의 완벽한 연합작전으로 조선군은 추풍낙엽으로 궤멸됐다. 이 참패로 전체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평양마저 함락시켰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의정부시의원과 양주시의원이 너도나도 의장 한 번 해보겠다고 몽니를 부리고 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시민행복 정치보다는 자리다툼을 위해 첫판부터 쌈박질이니 기초의원 무용론이 나올 만하다. 민심이반의 폭주를 남발한다면 시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정치도 숫자 게임이 아니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