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좋아서 시작한 취미생활이 자신의 전공을 밀어내고 평생 직업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국악인 황병기 선생의 인생도 그러하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으나 바로 서울대 음대 국악과 강사로 또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 음악에 매달렸다. 현대 국악을 개척하면서 가야금 연주자로 그는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어 범 아시아적 음악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음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지만 무엇을 하든 가야금은 매일 했어요. 가야금은 좋아서 항상 하는 거니까요.”
황병기 선생은 1936년 5월31일 서울의 북촌이라 불리우는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2대 독자로 손이 귀했는데 결혼 후 딸 하나 낳고 16년간 전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드디어 황병기 선생을 낳게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를 잘 불러 독창자로 뽑혀 KBS에도 출연하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악기를 하나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악기 살 돈이 없어 시작을 못하고 있다가 중3 때 한국전쟁 피난지 부산에서 친구 따라 학교 근처 고전무용 연구소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가야금이라는 악기를 구경하고 소리를 듣게 되었다. 처음 가야금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묘한 매력을 느꼈다. “아, 나는 가야금을 꼭 배워야겠구나. 정말 좋구나.” 역사시간에 가야금에 대해 배우기는 했는데 삼국시대에 있다가 소실된 전설 속의 악기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무작정 가야금을 배우려 하자 아버지, 어머니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워낙 의지가 강하니까 마지못해 “네가 정 하고 싶으면 해라. 네 인생은 네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잊지 말고”라는 승낙을 받았다.
가야금 배우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어머니는 부산에서부터 전라북도 전주까지 가서 가야금을 사다 주었다. “가야금을 처음 받은 날은 내가 마치 애인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가야금을 받은 첫날 밤에 마치 신부처럼 벽에다 세워 놓고 자다가 몇 번이나 일어나 불을 켜서 쳐다보고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그는 가야금을 국립국악원에서 정악으로 배웠고 다음에는 민속음악의 중심인 가야금 산조를 산조 전문가에게 배웠다.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 국악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하였으나 음악대학이 아니라 서울대 법과대학을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야금은 그냥 좋아서 취미로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음악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꿈에도 못 꿀 일이었다.
그의 집이 있던 가회동(현재 현대 사옥 자리)에서 비원 앞에 있던 국립국악원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여서 매일 학교를 끝나고 집에 오면서 가야금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 KBS 주최 전국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하면서 그의 이름은 음악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서울대 음대 현제명 학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신설되는 국악과에 강사로 나와 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황병기 선생은 자격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현제명 학장은 집요하게 설득했다.
“법관이 되려는 사람은 삼태기에 담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악계는 지금 황무지나 다름없고 이제야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과가 신설되는데 국악을 제대로 가르칠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으니 꼭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게.”
결국 황병기 선생은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음대 강사가 되는 특이한 길을 가게 된다. 이후 황병기 선생은 어느 작곡가로부터 가야금과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을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가 작곡한 곡이 국립극장에서 <가야금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이라는 타이틀로 초연되면서 ‘국악과 양악의 악수’라는 표현으로 신문 문화면에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황병기 선생은 1962년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소설가 한말숙씨와 사귀다가 결혼했는데 그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1974년 이화여대 음대에 국악과가 신설되면서 부교수로 국악과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99년 대장암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입원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시계탑을 보며 ‘내가 지금은 비참하고 힘들지만 저 밤에 아름다운 조명을 받는 시계탑처럼 아름다운 곡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떠올리며 병원에서부터 <시계탑>이라는 곡을 구상해서 퇴원하자마자 작곡했고 2달 후 독주회, 4달 후에는 독일 공연도 하게 되었다.
그는 국악인뿐 아니라 윤이상, 백남준, 백건우, 존 케이지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였고 2003년에는 하와이에서 46년이나 연하인 첼리스트 장한나와도 협연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도 가졌고 1990년에는 평양에서 가야금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표작으로 <침향무>, <비단길>, <하마단> 등 여러 곡을 작곡하였고, 2018년 1월31일 지구별을 떠나 우주로의 국악 여행을 떠났다.
그가 법대를 졸업하고 법학도의 길로 갔다면 판사나 검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국악의 개척자 가야금 명인 황병기’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법조인의 길을 포기하였기에 ‘국악인 황병기’는 우리 국악 역사에 우뚝 선 존재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선택은 포기를 동반한다. 웃음과 행복을 선택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 체면과 가식을 포기해야 하나?
하하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일단 웃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