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공동선언의 주역,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 영면하시다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까지 전 세계는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축제를 지켜보았다. 한반도의 남북한 두 지도자가 평양이라는 무대에서 전 지구를 향해 평화통일을 다짐했다. 그들은 한반도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고 선언하면서 뜨겁게 포옹했다. 단군 이래 동북아의 한반도가 그처럼 당당하게 전 세계인에게 다가간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세계사의 한 장을 멋지게 장식한 위대한 쾌거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던 것은 통일을 향한 커다란 노력이 거둔 장엄한 성과였다. 그가 분단 55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 민족과 한반도 평화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때의 감격을 다시 되살려 보자.
김 전 대통령과 공식 수행원이 탑승한 공군 1호기가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한 것은 6월13일 오전 10시27분. 그때 공항 입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측 지도자가 등장하자 마중 나온 평양시민들은 진홍·빨강색의 조화를 흔들며 “결사옹위” “김정일 만세” 함성소리를 질러 공항이 떠나갈 듯했다. 비행기 앞문이 열리자 김 대통령은 잠시 서서 승강기 아래 서 있던 김 위원장과 눈 인사를 나눈 뒤 같이 박수를 쳤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승강구를 내려와 김 위원장에게 다가서자 김 위원장도 서너 걸음 앞으로 나오며 김 대통령과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간 악수를 나눴다. 이때가 10시38분. 두 정상은 두 손을 맞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남과 북의 정상간 첫 상봉이 이뤄지자 환영 나온 평양시민들은 진홍색 조화 다발을 흔들며 “만세” 등을 외치며 뛰면서 열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구촌 곳곳에 TV로 생생하게 중계되는 통일 축제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은 움직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두 정상은 ‘6·15공동선언’을 통해 통일의 자주적 해결, 연합-연방제 공통성 인정, 친척 방문단 교환, 경협확대, 당국자간 대화 재개 등에 합의했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도 발표했다.
6·15공동선언으로 인해 거두어들인 유·무형의 성과는 실로 엄청나다. 우선 국제적으로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분단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의지와 그 능력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 성과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값진 결실로 연결되었다. 더욱이 9·11테러와 아프간 사태 등으로 전 세계가 평화 파괴의 불안감에 시달릴 때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6·15공동선언은 그 후 2007년 10·4선언이라는 결실로 연결되었다. 6·15공동선언이 남북 평화통일의 로드맵이라면 10·4선언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청사진이었다.
6·15공동선언의 남측 주역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서거한 후 석 달이 며칠 모자라는 날 김 전 대통령은 우리 곁을 떠났다. 수난의 근현대사를 살면서 평생 민주주의, 평화통일, 대중경제를 위해 전력을 다했던 위대한 정치거인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김 전 대통령은 30여년간의 군사독재 기간 동안 살해 위협과 망명, 가택연금, 투옥으로 10여년간의 고통을 당했다. 그 기간 동안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한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지면서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기나긴 시련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신앙심과 정의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남북통일을 위해 토론하는 것을 상상하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장기를 두는 것과 같은 대화 방식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평화적인 한반도 통일 방안을 구상했다. 남북한의 점진적인 통합 과정은 신뢰를 쌓기 위한 협력사업으로 시작해서 남북한 공동의회, 국가연합, 연방정부 구성으로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북측과 평화공존을 달성할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이 6·15 공동선언이다. 햇볕정책은 남북간에 분단의 장벽을 허물면서 경제적, 문화적 관계가 긴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인권과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두 번의 결정적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바다에 수장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였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한다고 공언했다. 집권 후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고 신군부에 대해서도 관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김 전 대통령은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혁명이었다. 그 승리는 선거에 의해 야당이 집권한 헌정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다. 그는 IMF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회복 정책과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해 언론기업의 투명화를 시도했다. 북한과의 화해공존 정책을 추진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금강산 관광, 남북간 도로 철도 연결 등의 성과를 거뒀다.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여성부 신설, 정보통신(IT)산업 기반정착 등 인권과 복지분야에서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 집권 기간 동안 대선에서 연합한 김종필 세력과의 정치적 공조라는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그러나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기득권층의 반발은 거셌고 개혁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노동조건은 악화되었다. 지역감정과 지역분열을 해소하지 못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지연되면서 북한 퍼주기 비판이 거세졌다. 그는 임기 말 두 아들과 측근의 비리로 도덕성에 타격을 받아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해졌다. 퇴임 후 2003년 초 대북송금 특검과 2005년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 등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 후퇴, 남북관계 악화 등이 심화되자 김 전 대통령은 정치현안에 대한 발언을 거듭하면서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며 크게 슬퍼했다. 그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장을 찾아 통곡하면서 고인을 애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행사에서는 현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비판하는 등 사자후를 토해냈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급격히 쇠약해졌고 이 대통령의 거듭된 대북 강경책 속에서 병세는 악화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명쾌한 논리로 해박한 기억력을 자랑하던 김 전 대통령은 최근까지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 등 3대 문제와 씨름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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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김대중 도서관 제공 |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했다. 해방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회사의 관리인으로 선임된 뒤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잡혀 총살될 뻔 했으나 탈출해 위기를 모면했다. 1954년 정치에 입문해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에 출마해 수차례 낙선한 후 네 번째 도전한 1961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로 의원 등록도 하지 못했다. 6,7,8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면서 명연설과 카리스마 넘치는 야당 지도자로 부각됐다. 1971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박정희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을 공격했다. 40% 이상의 득표를 했으나 박정희에게 95만표 차이로 패했다.
그는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1973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바다에 수장될 위기에 처했다. 배 속에 갇힌 채 현해탄 한가운데에 던져져 살해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생명을 건지고 강제로 서울로 압송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치활동은 저지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 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신정권은 그의 투옥에 대해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켰다.
그는 1979년 10·26이 발생해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 복권됐다. 1980년 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5월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와 함께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뒤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미국 등 외국의 항의와 압력이 거세지자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온 뒤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으나 야당진영의 주요 리더 역할을 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87년 6월 항쟁에 실질적으로 굴복한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통해 김대중의 정치활동 재개를 약속했다.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정치적 협력자이자 라이벌인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 등의 이유로 낙선했다. 당시 투표결과를 보면 당선자 노태우는 36.5%, 김영삼 28%, 김대중 27%였다. 두 김씨가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으면 민주진영이 승리할 수 있는 것으로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1988년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후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김영삼이 야당진영을 떠나 여권으로 몸을 옮겼다. 1992년 대권에 다시 도전했으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원직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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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우/미디어오늘 논설실장 |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한 후 1995년 6·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7월에는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96년 4월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자신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의 지위를 굳히면서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꼬리를 무는 부패 스캔들과 경제문제로 지지도가 바닥세였다.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네 번째 도전했다. 투표 수주 전에 IMF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이회창 후보에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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