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곳에 취직을 못한 나는 백화점에 여성의류를 납품하는 회사에 다녔다. 나 혼자라면 무엇이라도 하겠지만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도 생겼기에 호구지책이 필요했다.
의정부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시청에서 신촌 가는 전철을 갈아타고 신촌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회사까지 2시간 반은 걸리는 힘든 출퇴근이었다. 전철에서 항상 책을 봤다. 어느 날 ‘노동의 역사'라는 핸드북을 읽고 가는 중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전율에 미칠 것 같았다. 그 글은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다.’
스물 즈음,
대학에 들어간 나에게 두 가지 명제가 있었다. 하나는 ‘조국의 통일’, 다른 하나는 ‘나란 무엇인가?’였다.
조국의 통일에 대한 답은 쉬웠다. ‘조국분단의 원인은 한국전쟁이고 한국전쟁의 시원은 일제식민지다. 일제식민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제식민지에 뿌리를 둔 군부독재를 이기는 길이며 그 가장 빠른 길이 민주화’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란 무엇인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기독교에 가서 예수를 만났다. 부처나 성철, 구산 스님도 만났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배웠다. 조국의 산하를 돌아다녔다. 우주와 시간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10년 이상을 고민했지만 시원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서른 즈음 전철 기차 안에서 읽은 맑스의 이야기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다’라는 글을 읽는 순간 머리카락이 섰다. 너무 기뻐 고함을 지를 뻔했다. 그 전에도 ‘노동의 역사’를 읽었지만 그 말을 이해하는 순간 나의 두 가지 명제에 대한 답이 풀렸다.
오십 즈음,
내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실천’이다. 민주화 백 번 떠들어봐야 한 번의 실천만 못하다. 실천이 나를 만든다. 실천해야 내가 드러난다. 국회에서 배운 지식을 지역에서 실천하자는 ‘정치개혁모임’ 회원들의 회합 후 ‘고향 앞으로’를 실천하여 시의원이 됐다.
처음 시의원에 당선되어 진짜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다. 30년 공무원을 하신 분이 “왜 이런 걸 질문하세요?” 되물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되돌아 생각하니 내 정도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 쯤 김대중 형이-나는 이 어르신을 ‘김대중’이라고 호칭한다. 대중이형 이라고도 한다. 이 형은 한국사에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인물이시다. 선생도 좋고 대통령도 좋지만 어렸을 때부터 대중이형이라고 불렀다- 말씀하시는 ‘행동하는 양심’의 의미를 깨달았다.
행동은 실천이고 양심은 진리다. 동양에서 말하는 진실이다. 김대중과 서양에서 지난 천 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맑스와 동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흐트러지고 어려울 때 나는 대중이형을 생각했다. 그 분이 걸어온 길을 생각했다. 내가 좌절할 때 김대중의 꼬장꼬장한 여유를 배우려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당신마저 돌아가시면 우리는, 우리나라는 어쩌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왜 민주당은 당신을 배우지 않냐’고 그렇게 통탄했는데, 당신마저 가시면 우리는 치고 박고 난리가 아닐텐데, 아 당신마저 가시다니.
문희상이 생각난다. ‘책임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경기도의회 의원 박세혁(의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