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아마추어 같은 정책결정 과정이 주민들의 일상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8월15일 이명박 대통령 입에서 행정구역 개편 촉구 발언이 나오자, 정부가 8월26일 급히 내놓은 ‘자치단체 자율통합 지원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자칫하다간 지난 7월 국회를 쓰레기장으로 만들며 정국을 급랭시키고, 시민사회를 분노로 들끓게 했던 언론법 날치기 사태와 닮은 꼴이 될까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자율통합 지원계획 발표 뒤 지역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주민들의 요구를 거의 수렴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세워놓은 일정대로만 사실상 통합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행정구역이 통합되면 무엇이 좋고 나쁜지, 통합시군의 미래 청사진은 무엇인지 먼저 제시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나 청사진 없이, 원론에 가까운 학문적이고 일반적인 논리만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통합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과 인센티브만 강조할 뿐 문제점이나 갈등요소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 일정대로 10월 중순 여론조사 뒤 지방의회 의견을 청취하고, 통합 여론이 강한 곳은 12월까지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내년 7월1일 통합자치단체를 출범시키겠다는 계획만 내놓고 있다. 이같은 방침에 부화뇌동한 일부 정치인들이 정부의 손과 발, 입이 되어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통합을 추진하려면 먼저 해당지역 민·관·정 대표자들로 구성된 의견수렴위원회 같은 통합조율기구를 만들고, 이곳에서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에 통합의 장단점과 청사진을 연구·제시하도록 용역을 맡기고, 이를 해당지역 주민들에게 꼼꼼하게 설명하는 것이 옳은 절차다. 그리고 주민들이 통합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이와는 거꾸로다. 통합하자고 하면서도 청사진은 제시하지 않은 채, 통합하고 나서 시 명칭과 시청소재지, 행정기관 재배치 등을 논의하자는 것은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 민심이 갈기갈기 찢어져 만신창이가 되도록 방치하겠다는 뜻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시세가 강한 곳의 승자독식이 될 가능성, 흡수통합 우려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더 큰 반발이 터져나오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이 지난 7월 언론법을 불법적으로 날치기 통과시킬 때, 언론법을 세세하게 알고 투표를 한 국회의원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알지도 못하고 청와대의 하수인이 되어 날치기를 강행한 것이다.
지금처럼 정부가 구체적인 설명없이 통합을 추진하겠다며 대뜸 여론조사를 하고 주민투표를 강요하는 것은 국민을 한낱 정부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것과 같다. 게다가 통합을 뒷받침할만한 정교한 법안(자치단체 자율통합법 등)이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미루어 법제정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주민을 기만하는 꼴이다.
일방통행식 정책결정은 과거 독재시절과 다를 게 없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충성스럽게도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날치기로 행정구역 통합을 처리하게 되면 역사·사회·정치·문화적으로 심각한 폐해와 후유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사회적 합의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정부 때문에 의정부·양주·동두천시는 지금 민심이 이반되어 서로를 경계하고, 옆집 사람끼리도 불편한 관계가 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순수한 의도는 사라지고 언론법 날치기 후유증을 행정구역 통합 이슈로 가리려 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