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청사대 화신’ 고종은 조선 망국의 우두머리다. 자신과 민비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위기 때마다 청군의 개입을 주저 없이 요청했다. 때문에 수십만명의 조선 백성이 청군에 도륙당했다. 여기서 잠깐, 당시의 청군은 만주족이 아닌 리훙장의 한족 북양군이다.
시발점은 임오군란이다. 민씨 척족의 가렴주구에 생존권을 위협받은 구식군대가 봉기했고. 민생파탄으로 도시 빈민층이 동참했다. 대원군이 재집권했지만 민비와 척족은 청군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들은 조선반도에 출병하자마자 내란 우두머리로 규정된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했다. 구식군대와 빈민층이 거주하던 왕십리와 용산 일대에서 피의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백성은 죽고 고종과 민씨 정권은 살았다.
청은 곧바로 청구서를 들이댔다. 이게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다. 1882년 8월23일 조선과 청이 체결한 불평등 무역협정은 청의 조선 내정간섭 강화와 경제 식민지를 초래한 경제 참사다. 그 내용을 보면 고종과 민씨 정권의 국정 프레임인 ‘자주독립국 조선’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청 상인의 특권 부여, 조선 내륙시장 진출 허용, 관세 면제 등이 포함됐다. 고종과 민씨 정권은 기득권을 지켜준 청에게 이 정도는 껌값이었고, 어차피 백성이 부담할 몫이었기에 관심 밖이었다.
또한 청 상인의 치외법권 인정, 조선 상인과의 경쟁에서 우위 확보, 조선의 종속성 강화, 조선왕을 청의 북양대신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외교·재판 관할권을 청에 부여했다. 결국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재확인했고, 국제 사회에서 자주독립국가 조선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일본과 서구 열강은 하이에나처럼 조선을 뜯어 먹기 위해 달려들었고, 조선은 청의 속국을 자처하며 서구 열강과 잇달아 외교 관계를 맺었고, 최혜국 대우가 기본이 되자 조선 경제는 폭망하기 시작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경제 독립을 팔아먹은 고종과 민씨 정권은 28년 후 그들의 기득권은 살았지만 나라는 망했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