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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윤씨 종중, 설초 윤안국 선생 묘비 제막식
외손인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이 지은 묘비문 발굴 기념해
  2025-11-17 16:07:17 입력

양주윤씨 종중이 11월15일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 대춧말 선산에서 시조 윤숭(尹崇)의 9대 후손인 설초(雪樵) 윤안국(尹安國) 선생의 묘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날 윤재영 종중 대표와 윤치열 묘비 제막식 추진위원장(문의 010-5069-2138), 종중원, 양주 지역 다른 종중 대표 등 50여명이 참여해 묘비 제막식을 엄숙하게 치렀다.

설초 윤안국은 1569년(선조2)에 태어나 1629년(인조8) 명나라 동지사(冬至使) 사행길에 중국 각화도 앞바다에서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61세에 순직한 인물이다. 올해 11월15일(음력 9월26일)은 순직 396년째가 되는 날이다.

1589년(선조2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23세인 1591년(선조24)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했다.

1629년(인조7) 형조 참의가 되었고, 동지사에 임명됐다. 요동 지방이 후금 누르하치에게 함락당해 명나라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조선 사신 일행은 배를 타고 해로(海路)를 이용했다. 1626년 9월17일 동지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북신구(北汛口)에서 돛을 달고 각화도(覺華島)로 향하던 중 9월26일 동남풍이 크게 일어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했다. 

부인 우봉 이씨(牛峯 李氏)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1녀가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결혼하여 서계 박세당을 낳았다. 외손자인 서계 박세당이 후일 설초 윤안국의 묘비문을 지었다. 2023년경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묘비문 원본을 발굴한 후손들이 그 묘비문을 새긴 묘비를 새로 세워 선조의 우국충정을 기린 것이다.

서계 박세당은 묘비문에서 “나는 애모(哀慕)하여 울먹이고 눈물이 흘러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아! 천지에 큰 재앙이 있는데 공이 먼저 당했으니 명명(冥冥)한 운수를 누가 그 단서(端緖)를 알 것인가?”라며 애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설초 안국 묘지명 번역문(전문)                             
외손자 서계 박세당 지음

천지에 큰 재앙이 일어 엎어지고 빠지고 떨어지고 하면 역리(易理)가 뒤집히고 상도(常道)가 길을 잃어 일월성진(日月星辰)이 제 운행(運行)을 할 수 없고 산악(山岳)과 하천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없는데 사람 역시 불행히도 그 사이에 있어서 먼저 재앙에 연루되어 강녕(康寧)한 복을 지탱하고 수고(壽考)의 경상(慶祥)을 온전히 할 수 없으니 슬프고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기운의 변화나 앙화(殃禍)의 액회(厄會)를 뉘라서 그 연유를 알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청나라가 날로 강성해지자 사신으로 연겅(燕京)에 갈 사람이 육로가 막힘으로써 해로를 취하니 풍랑이 험악하여 표류하고 전복하는 일이 앞뒤로 줄을 잇다시피 하였다. 

기사년(1629년 인조 7년) 가을에는 외조부께서 하절사(賀節使)로 연경에 갈 때에 각화(覺華)의 앞바다에 이르러 풍파를 만나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40년 되던 해에 나 박세당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면서 영원(寧遠)을 지나려니 각화(覺華)가 바로 그 앞에 있었다. 

조흥구(趙興球)가 수레 곁에 따라오면서 배가 치패(致敗)했던 곳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늙은 역관 전사홍(田嗣洪)과 이곳을 지났는데 전사홍은 공을 따라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이며 이를 연유로 제가 전사홍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당시에 배가 거의 육지에 닿았는데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거꾸로 불어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마침내 치패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는 애모(哀慕)하여 울먹이고 눈물이 흘러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아! 천지에 큰 재앙이 있는데 공이 먼저 당했으니 명명(冥冥)한 운수를 누가 그 단서(端緖)를 알 것인가?

공의 휘(諱)는 안국(安國)이고, 자는 정경이며, 호는 설초(雪樵)이고, 성은 윤씨로 양주사람이다. 9대조 윤숭(崇)은 고려 말엽에 중대광도첨의정승(重大匡都僉議政丞)을 지냈고 5대를 내려와 윤장(璋)은 중종을 섬겨 공조 판서가 되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좌통례 휘 계훈이고, 조부 휘 시우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부친은 수운판관(水運判官) 휘 응상이니 소시에 유배(流輩)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는데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도 한번 만나보고 허여하였다. 비 이씨는 양녕 대군의 후손인 교하 현감 이원우의 딸인데 온혜 숙신하여 한번도 질언과 거색이 없었다. 

공은 선조 2년(1569년) 2월 4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총명하고 숙성하여 글에 대하여 한번 들으면 바로 이해하고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소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그때에 사대부(士大夫)의 논의가 동서로 갈라져 공이 승문원(承文院)에 선임(選任)되었으나 당사자가 공을 성혼 이이의 당이라 하여 내쫓고 임직(任職)을 주지 않았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에 내간상을 당하였고 계사년(1593년 선조 26년)에 외간상을 당하였으며 을미년(1595년 선조 28년)에 복을 벗고도 그대로 서원(청주淸州의 옛 이름)에서 살고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

무술년(1598년 선조 31년)에 순례대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명나라 참장 왕국동(參將 王國棟)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영남으로 따라갔다가 기해년(1599년 선조 32년)에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 전란이 끝나자 왕참장(王參將)을 전송하여 의주(義州)까지 갔는데 때마침 업무중 서관란(徐觀瀾)이 도산(島山-울산에 있는 加藤淸正의 진지) 전투의 공죄(功罪)를 조사하러 나오자 판서 신점(申點)이 접반사가 되어 공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일이 끝나자 도로 서원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경자년(1600년 선조 33년)에 홍여순(洪汝諄)과 이이첨(李爾瞻)이 서로 알력(軋轢)을 일으키자 선조께서 두 사람의 행위에 노하여 둘 다 내치려 하니 이이첨이 그 당의 조정(趙挺)과 꾀하여 공을 천거하여 이조(吏曹)에 있게 함으로써 후일을 도모하려고 하여 공의 의사를 떠보았으나 공이 불응하자 그만두었다. 상국 김명원(相國 金命元)이 이조를 맡고 있을 때에 상국 한응인(韓應寅)에게 인재에 대하여 물으니 한 상국이 공을 천거하여 다시 공조 좌랑에 제수되어 예조 좌랑으로 옮겼고 다시 병조 좌랑으로 옮겨 신축년(1601년 선조 34년)에 병조 정랑으로 올랐으며 5월에는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
 
공은 의표(儀表)가 헌걸차고 수염이 아름다워 조정에 서면 용모가 반열에서 특출하니 선조께서 보고 기이하게 여겨 좌우에게 누구냐고 물어 공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뜻은 병조 정랑을 중히 여겨 그 직책에 오래 있게 하려고 하여 전후로 대각(臺閣-사헌부 지칭)이나 시종(侍從)으로 의망(擬望)된 적이 수십 차례였으나 끝내 옮기지 못하였고 최후에는 임금이 노하여 이조(吏曹)의 청(郎廳)을 꾸짖기까지 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5월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호(鄭賜湖)를 따라 북경에 갔는데 처음에 전적(典籍)으로 옮겼을 때에 정공(鄭公)이 깊이 공을 경중(敬重)하여 이르기를, “공과 같은 큰 도량은 우리들이 마땅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였다. 10월에 돌아오니 다시 병조 정랑에 제배되었다. 

기자헌(奇自獻)이 공의 이웃에 살고 있었으나 공이 그를 찾아보지 아니하니 기자헌이 깊이 함혐(銜嫌)하였는데 공이 북경에서 돌아오자 강주(姜籒)가 어사(御史)가 되어 행이(行李-여행짐)를 검색하면서 기자헌의 지시를 받고 미세한 일로 모함하여 거의 죄를 입을 뻔하였는데 이듬해인 계묘년(1603년 선조 36년) 가을에는 마침내 공을 울산 판관으로 내보냈다. 그때에는 난리를 치른 지 오래지 않고 울산은 해변이라서 해적들이 출몰하였는데 전형(銓衡)에 당해서 먼저 병조의 계책을 받아들여 공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것이다. 공은 임지에 이르자 전란의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겸손하게 백성들과 사귀며 엄격하게 몸가짐을 하였다.

갑진년(1604년 선조 37년)에 명나라 유격장(游擊將) 동정의(董正誼)가 해상에 이르러 해적을 정탐할 때에 크게 병위(兵威)를 베푸니 우리나라 관리는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거의 구욕(毆辱)을 당했으나 공을 보자 유독 공에게만은 정중하게 예대(禮待)하였고 공의 말이라면 항상 자신의 뜻을 굽히고 따랐다. 한번은 공에게 무슨 벼슬에서 이 자리로 나왔느냐 묻고는 이내 탄식하기를, “공과 같은 덕을 지니고서도 외딴 외지에 버려두었으니 조정의 정사를 알 만하다.” 하였다. 이윽고 돌아가서 변사(邊事)를 아뢸 때엔 상주(上奏)한 일이 많았으나 특히 동국의 장이(長吏)들 중에는 울산의 통판(通判)만이 문무재(文武才)가 있어 한 지역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9월에 인수(印綬)를 풀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리었다.  

병오년(1606년 선조 39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금성 현령이 되니 정사에 더욱 근실하였다. 임해군이 사사(私事)로 청탁하여 누차 핍박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가을에는 재실(災實-재해손실) 보고가 격례(格例)에 맞지 않는다 하여 파직되었다. 무신년(1608년 광해군 즉위년) 광해군 초정에 다시 병조 정랑에 제수되어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옮겼다. 공이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일찍이 이산해(李山海)의 죄를 논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이경전(李慶全)이 이조 판서가 되어 마침내 공을 함경도사(咸鏡都事)로 내보내었으며 기유년(1609년 광해군 원년)에 병으로 사면하고 돌아왔다. 

경술년(1610년 광해군 2년)에 호조 정랑에 제배되어 어사(御史)로서 호남의 재실(災實)을 감찰하였고, 돌아와서는 직강(直講)에 제수되었으며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에는 사예(司藝)로 옮겼고 가을에는 종부사정(宗簿寺正)으로 옮겼다. 공의 외종형이 이이첨과 혼인을 맺고 이이첨을 위하여 성의를 다하고 있으면서 공과도 친밀하게 지내기를 매우 지극하게 권하자 공이 사례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자신을 지키는 것은 비유하자면 처녀가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은데 어떻게 자진하여 중매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혹자가 그 말을 전하니 이이첨이 크게 노하여 하마터면 불측한 지경에 빠질 뻔하였다. 

이해 가을에 북도에 기근이 들자 공이 어사가 되어 진휼하였고 임자년(1612년 광해군 4년) 봄에는 그 공로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으며 가을에는 독운사(督運使)로 영남의 곡식을 운반하였으며 겨울에 덕원부사(德源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때에 죄 없이 귀양 가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덕원부를 지나갔는데 공이 민망하게 여겨 안부를 살피고 구휼하기를 두루 지극히 하였다. 

한서평(韓西平), 한준겸(韓浚謙)이 함경도를 관찰하다가 절월(節鉞)을 풀고 돌아가는 길에 덕원부에 이르렀을 때에 역옥(逆獄)에 사련(辭連)이 되어 체포되었는데 체포하러 온 자가 포악하기 그지없어 공이 뇌물로 베 50필을 주어 다소 늦출 수 있었다. 그러자 한서평이 선조께서 하사하신 궁시(弓矢)를 공에게 답례로 선물하고 떠났다. 공이 이 고을에 있는 3년 동안에 없어졌던 온갖 제도를 다시 다 일으키니 이민(吏民)이 모두 안도하였고 임기가 다하자 백성들이 유임을 청하였으며 떠난 뒤에는 사모하여 마지 않았고 덕정비(德政碑)를 세우기를 울산에 있을 때와 같이하였으며 그 뒤에도 부중(府中)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으로써 본보기를 삼았다.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 가을에는 분승지(分承旨)에 제수되어 정사년(1617년 광해군 9년) 봄에 체직되었고, 여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북경에 갔다. 그때에 성절사 김존경(聖節使 金存敬)도 동시에 도착하였는데 비밀리에 광해군의 소생모 공빈 김씨(所生母 恭嬪 金氏)를 위하여 고명(誥命)과 적위(翟禕-후비后妃의 예복)를 도득(圖得)하였으나 공은 모르는 척하였다. 돌아오자 김존경은 지사(知事)에 초제(超除)되었는데 혼자만 승진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상소하여 공과 함께 은전(恩典)을 나눠 입기를 청하였고 또 공을 찾아와서 공도 직접 말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다만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혹자가 하첩(賀帖)을 보내서 공을 놀리기를, “부귀를 공연스레 외면하고 시끄럽게 다투는 마당에 채찍 게을리 드네.(富貴空回首, 喧爭懶着鞭)”라 하였다.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 가을에는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은 조정의 정사(政事)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송추(松楸)로 물러나 살면서 시주(詩酒)로 스스로를 즐겼고 더러는 관동(冠童-청소년)과 더불어 소를 타고 산수(山水)를 찾았는데 산수가 좋은 곳에 이르면 즐거워서 돌아올 줄을 몰라하였다. 경신년(1620년 광해군 12년)에도 분승지로 불렀으나 사양하였고, 겨울에는 다시 유주사(劉主事)의 연위사(延慰使)로 임명이 되어 억지로 일어나서 의주(義州)까지 갔다 왔으며 신유년(1621년 광해군 13년)에는 또 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임술년(1622년 광해군 14년) 겨울에는 다시 모도독(毛都督), 모문용(毛文龍)의 접반사(接伴使)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회피하니 광해군이 노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였다. 그때에 폐주(廢主)는 혼미(昏昧)하고 포악(暴虐)함이 날로 심하니 제공(諸公)들이 극비리에 추방을 모의하고 인조를 추대하기로 하였다. 상국 홍서봉(相國 洪瑞鳳)은 공과 같은 고향으로서 항상 귓속말로 공을 부추겼으나 공은 확답을 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종군(從軍)하여 한원사(韓元帥), 한준겸(韓浚謙)을 서변(西邊)으로 찾아가서 그 막하에 있으려고 평산(平山)을 지나려니 연평(延平), 이귀(李貴)가 공에게 이르기를, “원수(元帥)를 만나거든 이 고을을 관할하기를 청하여 나한테 와서 있으시오.” 하여, 공이 승낙하였다. 그러나 정작 서평(西平)을 만나자 공이 가고 싶은 곳을 물어 공이 연평의 말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옥여(玉汝), 이귀(李貴)가 나더러 그곳으로 오라 하였습니다.” 하니, 서평이 손을 내저으면서 이르기를, “공은 가지 마시오. 옥여는 요사이 발광증(發狂症)이 났소이다.” 하고, 마침내 덕진(德津)에 배속하였다. 연평은 마침내 평산에서 거사(擧事)하였는데 공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년 인조 원년) 3월에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제2일에 호군(護軍)에 서용(敍用)되고 제3일에 판결사(判決事)에 재배되었는데 폐주(廢主) 때에 내부(內需司의 별칭)와 권세 있는 자들에게 빼앗겼던 노비(奴婢)들을 모두 본 주인에게 되돌려주되 비록 임금이 의아하게 여긴 바도 명백하게 개진(開陳)하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원근에서 환호하였다. 거기에서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옮기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뽑혀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일찍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니 임금이 조용히 시골에서 듣고 본 바를 물어서 공이 민폐에 대하여 낱낱이 아뢰었으나 다 쓰여지지는 못하였다. 하루는 입시하니 연평(延平)이 울면서 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관절(關節-청탁 편지)의 일로 귀양 가게 되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자 공이 앞으로 나서서 말하기를, “이귀(李貴)는 전하의 안전(眼前)에서 세세하게 이럴 수 없습니다.” 하니, 연평이 깜짝 놀라서 그만두었다. 

겨울에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는데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평소에는 휴휴(休休-의젓한 모양)하여 포용력이 있고 출처(出處)를 당해서는 작작(綽綽)하여 여유가 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는 실록(實錄)이라 말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시책(施策)에 대해 묻고 이르기를, “경은 틀림없이 잘할 터이니 나는 걱정이 없다.” 하고, 녹피(鹿皮)와 납약(臘藥-세밑에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보약)을 하사하였다. 공은 백성들이 도탄에서 허덕일 것을 생각하고 심력을 다하여 어루만지고 백성에게 이롭지 않은 일은 비록 털끝만한 일이라도 반드시 조심하였다.   

갑자년(1624년 인조 2년)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다른 도(道)보다 먼저 들어와서 후원(後援)을 하다가 가을에 병으로 돌아갔고, 겨울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으며, 병인년(1626년 인조 4년) 여름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가서 강한 자는 억누르고 약한 자는 북돋아주었다. 그때에 병적(兵籍)을 작성하였는데 상주(尙州)는 현존의 병적이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김경징(金慶徵)이 사의(私意)로 부탁한 것을 공이 들어주지 않자 그의 중상(中傷)을 받아 정묘년(1627년 인조 5년) 봄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29년 인조 7년) 봄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고 가을에는 하절사(賀節使)로 북경에 들어갔다. 처음에 동도(東道-요동遼東 가는 길)가 오랑캐들에게 막히자 조공(朝貢)하는 사람이 모두 바닷길로 등·래(登萊,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도착하였는데 원숭환(袁崇煥)이 요동을 진무(鎭撫)하면서 “등·래는 북경의 문지(門地)이니 금해야 한다.” 하여, 처음으로 각화(覺華)의 길을 열었다. 각화의 길은 철산(鐵山)을 경유하여 북으로 바다에 떠서 몇 고비 험로(險路)를 지나 영원(寧遠)에 이르러 육지에 붙어서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바닷길이 험하고 멀기가 등·래보다 10배나 더하여 사람들이 모두 위험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공은 친근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만일 죽을 때가 되었다면 집에 있다고 해서 어떻게 면하겠느냐?” 하였다. 

이해 8월 초하룻날 평양(平壤)에서 배를 타고 가서 9월 17일에 북신구(北汛口)에서 돛을 달고 각화로 향하였는데 동남풍이 크게 일어 돛은 끊기고 배는 침몰하였으니 아! 슬프다. 오직 서장관(書狀官) 정지우(鄭之羽)와 진하사(進賀使) 이흘(李忔) 만이 죽음을 면하였다.

경오년(1630년 인조 8년) 2월 6일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서 치제(致祭)하고 넉넉히 쌀과 베를 내렸으며 또 쌀을 주어 3년상을 마치도록 하였다. 9월 26일에 양주의 석적리(石積里) 발우산(鉢盂山) 경좌(庚坐)의 언덕에 의관장(衣冠葬)을 지냈다. 

부인 우봉 이씨는 자녀 넷을 길렀는데 장남은 지평(持平) 미(敉)이고 다음은 유(攸), 징(徵)이며, 딸은 이조참판 박정(吏曹參判 朴炡)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인의 생전에 네 자녀가 모두 몰(歿)하였다. 부인은 경인년(1650년 효종 원년) 정월 13일에 졸(卒)하니, 향년 80세였다. 그해 8월 4일에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미(敉)의 아들은 봉래(鳳來)이고, 딸은 정우(鄭佑)의 처인데 모두 일찍 죽었다. 유(攸)의 1녀는 출가 전에 죽었고 측실에게서 난 아들은 혜래 춘래(惠來 春來)이다. 징(徵)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붕래(朋來)는 백부 미(敉)의 뒤를 이었고, 다음은 정래(鼎來), 형래(亨來)이며 딸은 유교령(柳喬齡)의 처이다. 붕래, 정래 및 유교령의 처도 일찍 죽었다. 

박정은 4남 1녀를 낳아 장남은 박세규(朴世圭)이고 다음은 승지 박세견(朴世堅)이며 다음은 박세후(朴世垕)이고 다음은 참의 박세당(參議 朴世堂)이며, 딸은 군수 이영휘(郡守 李永輝)의 처이다. 

봉래의 딸은 판관 안지(判官 安至)의 처이고 붕래의 2남은 희호(熙亮), 희서(熙敘)이며, 정래의 딸은 이의하(李宜夏)의 처이고, 형래의 2남은 희경(熙敬), 희조(熙朝)이고 나머지는 너무 많아서 다 싣지 못한다. 

공이 졸(卒)한 뒤에 장자 미(敉)가 죽고 후사가 없자 공의 아우의 아들 도(度)가 상소하여 붕래로 하여금 미(敉)의 뒤를 이어 공의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기를 청하자 인조께서 민망하게 여기고 윤허하였으며, 금상(今上, 숙종) 때에도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신절(臣節)을 권면해야 옳다고 말하는 이가 있어 임금이 그 말에 따라 이조(吏曹)에 신칙하였는데 형래가 이로 말미암아 관직에 제수되어 지금 회인현감(懷仁縣監)으로 있다. 

 

유종규 기자(freedomy@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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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3대에 걸친 병역이행 기
 동두천시, 2026년 제19기 EM 아
 노후·무연고 간판 등 재난위험
 
김민호 “정덕영은 정성호 보좌관? 부하?” 직격탄
 
양주축협, 서울 바비큐 축제서 ‘한우풍경·돈모닝’ 판로 개척
 
대한민국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이다연 의원 “의정부시 해외투자 참여기업 선정 불공정”
 
백석농협, 관내 초·중·고 5곳에 장학금 500만원 기탁
 
권영선 의원 “의정부 파크골프장,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걷기 명상
 
“뒷담화·업무 불만, 직원 단체 톡방에 쓰면 징계감?”…표현의 자유와 징계의 경계
 
생사의 최전선(응급센터 압수수색과 필수 의료의 기로)
 
안전모 하나가 지키는 생명, 건설현장 안전의 기본을 생각하다
 
백석농협, 관내 취약계층에 연탄 나눔 봉사
 
조합장 선거, 추석 이후 30일 이렇게 준비하자
 
 
 
 
 
 
 
 
 
 
 
 
 
 
섬유종합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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