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12월30일자 남프랑스 아를의 지방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네델란드 화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돌연 라셀이라는 창녀를 찾아가 자신이 자른 자기 귀를 선물이라고 건네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이튿날 아침 이 가난한 정신이상자를 자기 침대 위에서 발견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왜 귀를 잘랐고 그 자른 귀를 창녀에게 주었을까? 파리에서의 2년 동안 고흐는 심한 초조감에 휩싸였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팔리지 않고 얹혀살던 동생 테오의 결혼이 임박해 형이 동생의 신혼집에 얹혀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흐는 파리의 어두운 빛도 너무 싫어서 남프랑스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프랑스 아를에서 그는 비로소 그림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바라기> 연작을 비롯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도개교> <노란집> <우편배달부 조셉 룰랭의 초상> 등의 작품을 그리며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는 가난한 화가들이 한곳에 모여 생활하면 식비와 집세 등의 부담이 줄고 누군가의 작품이 팔리면 공평하게 분배해서 서로의 기량을 연마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이루기 위해 예술가조합을 꾸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에 합류한 화가는 고갱뿐이었다. 고갱과는 예술관이 전혀 달랐고 서로의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늘 싸움의 연속이었다. 고흐는 고갱의 그림에 참견하고 결점을 지적하며 고갱이 좋아하는 앵그르, 드가의 그림을 매우 싫어했다.
고갱은 그런 고흐를 견딜 수가 없었고 결국 둘은 결별했고 이 결별은 고흐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사형선고로 받아들였다. 그는 떠밀려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귀를 잘라버렸다.
그런데 그는 왜 자른 귀를 창녀에게 주었을까? 아를에는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이 있다. 그곳에서는 여름마다 투우가 열렸는데 승리를 거둔 투우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포상은 소의 귀였다. 소의 귀를 자른 투우사는 그 귀를 들고 투우장을 일주한 후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인에게 그것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고흐가 이것을 흉내 낸 것으로 알려졌지만 고흐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의 정신상태는 이미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귀를 자른 2주 후 건강을 겨우 회복하였지만 마을 주민들은 청원을 내 고흐를 정신병원에 감금하도록 하였다.
고흐는 불면증과 환각으로 인한 정신 발작증으로 마을 주민들을 불안하게 하였던 것이다. 1888년 2월 경찰당국에 의해 위험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간신히 감금상태에서 풀려난 고흐는 1889년 5월 자진해서 다시 생레미 드 프로방스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고흐에겐 차라리 정신병원이 끔찍한 도시 아를을 빠져 나와 안전하고 최고의 요양원이 된 셈이었다.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비교적 잠깐의 안정을 되찾고 당분간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만 자꾸 간다. 내게는 시간이 없어. 그래서 촌각을 다투며 그림을 그리고 있어. 만약 더 심한 발작이 엄습하면 영원히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야. 지금 그릴 수 있을 때 전력을 다해 그려야 해. 나에게 시간은 지금 밖에 없어.”
1890년 5월17일 고흐는 생레미를 떠나 파리로 가서 동생 테오의 집에 나흘 머물다가 5월21일 파리를 떠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서 그곳 여인숙 3층의 한평 남짓한 다락방에 마지막 삶을 기탁한다.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그는 거의 휴식 없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투혼을 발휘하며 그림을 그렸다. 또다시 올지도 모르는 발작이 엄습하기 전에 남은 시간 마지막 열정을 온통 그림 그리기에 쏟아부었다. 이때의 그림들은 아를이나 생레미 시절보다 내용면에서 훨씬 빛을 발하였다.
1890년 7월27일 고흐는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평소 고흐를 살펴주던 의사가 와서 보니 총탄은 심장 아주 가까운 부위에 박혀 있었고 부상이 너무 심해 병원으로 이송도 수술도 불가능했다. 결국 이틀 후 7월29일 오전 1시30분 숨을 거두었다.
유서도 없었고 자살 원인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천재 화가 고흐는 그렇게 갔다. 빈센트 반 고흐는 비록 자살로 삶을 마감했지만 결코 절망의 대명사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영원한 삶을 동경하며 생활 속에서 희망을 그렸다. 그는 절망을 뚫고 나온 희망의 상징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를 위대하게 평가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는 서른 일곱 해를 살았고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는 9년간 879점의 그림과 1천여점의 소묘를 남긴 다작 작가였지만, 생전에 단 1점만이 팔렸고 대부분 동생 테오의 상점 지하실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삶에서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에게 절망은 더 그릴 것이 없는 것이지 빈곤한 생활이 아니었다. 그가 그림에 몰두한 시간은 겨우 10년 남짓이었고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운 시기는 죽기 전 두 달 동안이었다.
그리고 유서 대신에 유작 <까마귀 나는 밀밭>을 남겼다. 따로 글로서 유서를 남길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죽음은 절망도 끝도 아닌 도전과 새로운 시작이었고 별로 가는 기차여행이었다. 빈센트 고흐는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시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꽃을 그렸고 추수하는 농부를 평화롭게 그렸다. 거기엔 세상에 대한 증오나 분노, 원통함이 전혀 없었다.
떠밀리고 몸부림치는 삶에서 그의 그림은 위대한 승리의 흔적이요 지난 삶의 투쟁을 그대로 나타내는 기록이었다.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떠밀린 지점에서도 죽기 살기로 그렸던 고흐처럼 우리도 마지막 나만의 삶의 작품을 온몸으로 그려야 되지 않을까?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우리의 작품을 위해서 오늘도 웃는 하루가 되기를. 웃음 유산은 희망을 남겨주는 것이고 잘 웃는 삶은 훌륭한 인생의 작품이다.
하하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일단 웃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