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6일 시작되어 1970년 1월5일까지 벌어진 나이지리아 내전인 비아프라 전쟁은 전사자와 민간인 사상자가 120만명이나 속출했다. 이 잔인한 내전에서 딱 이틀 동안 휴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펠레의 축구 시범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1970년 월드컵 경기에 펠레가 출전했을 때는 도시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휴업하는 상점들이 속출했다.
펠레가 20세 때 이탈리아 프로팀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거액 스카우트 제의를 받자 브라질 국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펠레는 거래할 수 없는 국가의 보물”이라고 규정해 그의 해외 진출을 금지했다. 펠레는 20세기 영웅과 상징으로 타임지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외국인으로서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으며, IO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비공식적인 친선경기와 투어경기를 포함해 1,363경기에서 1,281골을 넣었는데, 이는 기네스북에 세계 축구 최다골 기록으로 인정됐다. 펠레는 브라질 국가 영웅으로 인정받았으며 펠레라는 별명 외에 검은 진주, 축구의 왕, 왕펠레 등으로도 불렸고, 브라질 대통령인 자니우 쿠아드루스에 의해 ‘브라질의 국보’로 지정됐다.
펠레는 1940년 10월23일 브라질 남동부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작은 마을 트레스코라송스에서 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 그의 이름은 전구발명자 토마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에드송(Edson)으로 지어졌으나 출생증명서에 잘못 적혀져 에지송(Edison)으로 기록됐다.
그의 아버지는 180㎝가 넘는 장신으로 헤딩을 잘하는 축구선수였으나 무릎 부상으로 은퇴하고 실업자가 되자 펠레는 한때 구두닦이로 가정의 생계를 도왔다. 어머니는 매우 엄격한 여성으로 아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운동선수 대신 안정된 직장을 갖기를 원했으며 이 때문에 펠레는 어머니 눈을 피해 아버지에게 축구기술과 마음가짐을 배웠다.
펠레라는 애칭은 지역연고팀인 바스쿠 다 가마의 주전 골키퍼 빌레 이름에서 따왔는데 학교 같은 반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아 반 친구들과 싸웠고 2일간 정학 처분받기도 했다.
펠레가 만 9세 때인 1950년 FIFA 월드컵이 브라질에서 개최됐는데, 강력한 우승 후보 브라질이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에 패배하여 준우승에 그친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고, 이때 펠레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으며, 아버지를 위해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켜 우루과이에게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했다.
10대 시절 아마추어팀에서 축구를 하다 1954년 바우루AC의 유소년 클럽에 들어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바우데마르 지 브리투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크게 성장했다. 바우데마르는 펠레의 재능을 알아보았으며 볼 컨트롤의 중요성, 경기의 흐름을 읽는 요령 등을 전수했고, 1956년 브라질 축구 명문 클럽인 산투스 입단을 주선했다. 입단 당시 펠레는 60㎏도 안되는 작은 체구이어서 1군에서 뛰지 못하고 2군과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산투스의 주전 공격수가 골절 부상을 입으며 시즌 아웃한 것을 계기로 브라질 프로리그 출전 기회를 얻었고 다음해 1957년 상파울루주 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고 그해 산투스와 정식계약을 맺었다. 1958년에는 38경기에 58골을 넣으며 연속득점왕에 오르게 됐고 드디어 브라질 국가대표로 발탁돼 FIFA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브라질 병역법에 따라 해군 상파울루 해안경비대에 징집돼 복무했고 군인 축구단에서 활동하며 103경기에 출전했다.
제대 후 1961년 3월5일 마라카낭에서 열린 플루미넨시FC와의 경기에서 산투스팀으로 출전하여 자기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공을 받아 그대로 드리블하여 상대 선수 5명을 제치고 마지막 골키퍼도 제쳐 결승골을 넣었다. 이는 마라카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을 기록했다는 찬사와 함께 ‘고우지 플라카’라고 불리는 펠레 인생에서 가장 유명한 골이 되었다.
이후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수천만 달러의 엄청난 액수의 이적 제의 요청이 들어왔으나 브라질 대통령이 국외로 유출할 수 없는 국보로 선언하고 이적을 저지하는 사태로까지 번져갔다. 산투스 측도 펠레를 달래기 위해 거액의 돈을 마련하여 지급했고 펠레는 산투스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1958년 스웨덴 올림픽에 17세로 출전해 세계 무대에 데뷔한 펠레는 17년간 동안 1게임당 평균 1골이란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고 많은 부의 축적도 이루었지만 늘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회상했다.
“나는 자라면서 가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은 정신과 두뇌 그리고 영혼까지 우울하게 만들며 인생에 독을 뿜어냅니다. 지붕 뚫려 새는 비는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입을 옷이 없고 신을 신발이 없는 것도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은 땔 나무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난은 이 모든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입니다. 그래서 가난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1970년에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 펠레는 이탈리아를 4:1로 누르고 우승하며 줄리메컵을 영구 보관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는 2021년 결장암으로 입원했고 2022년 12월29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전설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장애를 포기하지 않고 넘어서며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끝까지 펼쳐가며 몸으로 써 내려가는 이야기가 바로 전설이다. 펠레의 피와 땀과 열정으로 빚어진 축구의 전설을 우리는 마음속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자손들에게 웃음의 전설을 들려주고 싶지 않은가? 오늘도 웃는 하루 되시길.
하하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일단 웃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