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회를 중심으로 ‘의료사고 이력 공개 제도’ 도입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습니다. 환자의 알 권리와 알 권리 보장을 통한 안전한 진료 환경 조성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현장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제도가 가져올 결과는 명약관화합니다.
의사 개인의 이름과 함께 의료사고 이력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환자를 지키는 제도가 아니라, 생명의 최전선을 지키는 의료진에게 ‘낙인’을 찍어 현장에서 쫓아내는 비극의 시작이 될 뿐입니다. 예상되기는 고위험 환자 기피와 ‘회피형 방어 진료’의 일상화일 것입니다.
의료는 본질적으로 질병과의 싸움이며, 중증 외상·응급 수술·고위험 분만과 같은 필수의료 분야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합병증이나 사망이 발생할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습니다. 만약 의료사고 이력이 개별 의사의 명단과 함께 공개된다면, 의사들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환자의 생명과 ‘자신의 기록과 낙인’ 사이에서 갈등하며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대로라면 오늘 막 수술대를 잡기 시작한 경험이 미천한 의사는 ‘무사고 의사’로 평가받게 되고, 다른 병원에서 거절당한 중증·응급 환자를 받아 수천 건의 고난도 수술을 시행해 온 숙련된 외과의는 ‘위험한 의사’로 낙인찍히는 기형적인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지금도 많은 의사들이 소송 위험이 없는 안전한 환자 위주로만 진료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이런 경향이 증가 될 것이며, 위험도가 높은 중증 환자와 응급 수술을 기피하는 ‘회피형 방어 진료’가 의료계 전반으로 확산되어 3차 종합병원은 더욱더 복잡해지는 등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 걸까요?
또한 대한민국 필수의료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미 대한민국 필수의료 현장은 과도한 업무 강도와 사법 리스크로 인해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전문의가 되기까지 평균 4건의 소송을 겪을 만큼 사법 리스크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사고 이력 공개라는 심리적·법적 압박까지 가해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이국종 교수와 같이 사선을 넘나드는 중증 외상 분야나 소아흉부외과 등 생명과 직결된 분야를 전공하려는 젊은 의사들의 발길은 지금도 거의 없지만, 이제는 완전히 끊길 것입니다. ‘의료사고 이력 공개’는 의사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선의의 장치가 아니라, 필수의료 현장에 남아있는 마지막 의료진마저 사지로 몰아넣고 떠나게 만드는 ‘최후의 시그널’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치료의 동아줄’이 끊어지는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진료가 시급한 위중한 환자가 수술받을 병원과 의사를 찾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아래 추진되는 포퓰리즘적 제도가 역설적이게도 국민들의 치료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의료진의 사명감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것은 자극적인 문구나 입맛에 맞춘 ‘처벌 및 공개’ 위주의 정책이 아닙니다. 의사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소신껏 진료할 수 있도록 돕는 ‘형사 특례’ 등 현실적인 제도적 안전장치와 전문가 단체를 통한 자율 규제 시스템의 강화입니다.
의료의 특수성을 외면한 낙인식 이력 공개 제도는 공론화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의 생명을 구하러 나설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만들고, 그러한 문화를 지지해주는 것. 그것이 결국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 아닐까요?
양주예쓰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