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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운실 선교사와 중국인 친구들. 선교사는 얼굴공개가 싫다며 산사코 뒤에 숨었다. |
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지하 1층. 김치랑 배추를 볶은 반찬만 가지고 때늦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국인 부부가 기자에게 손짓한다.
“밥 먹었냐? 같이 먹자.”
잠시 뒤 나타난 나운실 선교사(사진 맨 오른쪽). 아들 셋에 손자까지 있다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적극적인 모습은 다른 이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
미국 선교모임에서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이야기를 듣고 결심하여 남편인 칙 네슬리 선교사와 같이 한국으로 건너와 지금 2년째라고 한다.
“처음 한국에 와서 구로공단, 안산, 경기도 광주의 공단을 돌아다녀 보니 외국인 천지더군요. 여기가 한국인가 의심스러웠어요.”
과거 주한미군이었던 칙 네슬리 선교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 나운실씨. 그이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의 느낌이 지금 외국인노동자가 한국 땅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많은 한국 분들이 외국인에게 잘해 주시지만 잘못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외국인의 습관, 문화가 한국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습관이나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에요. 문화차이를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체불임금 이야기가 나오자 나운실 선교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지금 경제가 어려운 건 나도, 여기 중국 친구들도 다 알아요.(그이는 외국인노동자들을 한결같이 친구라고 불렀다) 하지만 얼마씩이라도 줬으면 좋겠어요. 몇 개월씩 일하고도 돈 못받아 전화하면 욕만 하지요. 한 중국인 부부는 공장에서 급여 700만원을 못받아서 다른 공장에서 일했는데 거기서도 또 400만원을 못받고 사장이 사라졌어요. 조금이라도 받아야지 이 친구들도 먹고 살면서 고향에 송금할 텐데···.”
나운실 선교사 또한 미국에 아들 셋과 손자가 있다는데, ‘가족이 보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아들들이 기뻐하지 않았지요. 굳이 그렇게 멀리까지 가야 하냐고. 하지만 하나님이 원한 일이고, 이젠 자녀들도 이해합니다.”
외국인 친구들이 이곳에 모여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는 나운실 선교사. 그러나 요즈음 큰 고민덩어리가 생겼다.
“이 지하 1층에 월세로 들어왔는데 건물이 그만 경매에 들어갔어요. 보증금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쫓겨나게 되면 큰일이에요.”
작은 손길이라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우리 주변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고 외국인 친구들을 따뜻한 눈으로 대해주길 부탁하던 나운실 선교사. 옆자리에 앉아있던 중국인 노동자 왕소룡씨에게 선교사에 대해 몇 마디 묻자 한마디로 대답했다.
“좋아요, 좋아요!”
외국인노동자·중국동포의 집은 양주시 광적면 가래비 시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