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백아파금’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왔죠? ‘백아’는 음악인입니다. 거문고 타는 사람입니다. 그가 거문고 연주인이 된 것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 종자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자기는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내 생애 제일 큰 기쁨은 친구의 거문고 소리를 듣는 것이다.” 항상 와서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행복해 하니까 백아는 그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너무 좋아 점점 더 거문고를 잘 타려고 노력하다가 과연 한 나라에서 거문고를 제일 잘 타는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들려주는 행복으로, 하나는 듣는 행복으로 관계를 맺고 살다가 종자기가 죽었습니다. 종자기가 죽고 나니까 백아는 지금까지 생명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던 거문고를 집어던지고 도끼로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백아는 그 후로 다시는 거문고를 손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 교인이 명절에 고향에 다녀와서 심방을 원합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좋은 이야기 보다 불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명절에 내려가느냐고 하니, 부모님이니까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만나니 기쁨보다 아픔이 더 진하더라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면 과거를 돌아보고 어릴 때 아프고 속상한 감정이 나오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가 대학만 보내주었다면 하고 원망과 아쉬움이 묻어 나오게 되고, 한편으로 얼마나 어려웠으면 학교를 보내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야속한 자녀의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으로 말마암아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자녀로서 생각하고 말 못하고 올라와서 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원과 가정은 가꿀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여 서로 이해하고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나는 것입니다. 만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은 만남입니다. 만남과 선택을 통해 인생은 만들어져 갑니다.
좋은 만남은 좋은 인물을 만들고 좋은 인물은 좋은 인생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남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부모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영적 지도자와의 만남, 동역자와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이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부모와 친척과의 만남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만남은 얼마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땅을 만날 때 빛을 발합니다. 나무가 아무리 좋아도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인물의 배후에는 훌륭한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인물을 직접, 책을 통해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만남을 통해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큰 나무 곁에 가면 죽지만 사람은 큰 인물 곁에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좋은 만남은 우리를 변하게 해줍니다.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이 옵니다. 만남을 통해 우리는 내면을 보게 되고, 자신을 깊이 보게 되고, 우리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좋은 만남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을 살려냅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신화도 좋은 만남에서 창조됩니다. 이토록 소중한 만남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남이 그토록 아름답고 중요한 것만큼이나 잘못된 만남과 잘 가꾸지 못한 만남은 우리에게 엄청난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주곤 합니다.
정원사가 없는 정원은 잡초만 무성할 뿐입니다. 정원은 가꿀수록 아름답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의 눈에는 비전이 있습니다. 눈에는 씨앗을 뿌리면서 아름다운 꽃동산을 봅니다. 씨앗을 심으면서 아름다운 꽃을 보고, 꽃 내음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정원사입니다. 탁월한 정원사의 특징은 매일 정성을 다해 사랑을 가지고 정원을 가꾼다는 것입니다. 만남을 가꾼다는 것은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정원은 우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내 마음의 정원에 행복, 축복, 화목, 겸손, 섬김, 인내, 자비, 온유의 열매가 알알이 영글어가는축복된 만남이 되어야 겠습니다.
양주사랑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