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해요.”
이번 겨울 기름 한번 못 때고 매일 밤 세 가족이 마루에 있는 연탄난로 옆에서 자면서도 “그래도 따뜻했다”며 살만하단다.
동두천시 광암동에 살고 있는 김선희씨(57·가명)는 29년 전 포도막염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4년 후 둘째 딸을 가지고부터 두 눈이 모두 보이지 않아 지금은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그때는 둘째 아이와 함께 죽을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연탄을 피워서, 팔뚝을 그어서…”
시각장애인 1급인 김씨는 현재, 남편과 29살 된 둘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엄마 눈을 고치겠다며 돈을 벌기위해 미국으로 간 큰 딸은 연락이 잘 안된다.
불행은 한번 찾아 왔던 사람에게 계속 찾아오는지, 죽을 힘으로 여태껏 버텨왔던 김씨네 가족에게 지난해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김씨의 남편이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둘째 딸은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느라 미용실 보조 일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남편이 기초수급자가 되어 한달에 20여만원을, 김씨가 장애인수급으로 10여만원, 한달 고정수입은 40만원이 채 안된다. 김씨가 시각장애인협회에서 봉투에 끈을 끼워 넣는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봉투 하나당 12원씩 하루에 200여개를 만들더라도 3천원이 안된다. 월세 20만원과 세금을 내고, 생활이 빠듯하지만 한 푼이라도 모아야 남편 치료비를 댈 수 있다. 치료라고 해봤자 비싼 주사는 맞지 못하고 독한 약만 먹는 정도라고 한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난 힘든 일들을 말하며 눈물을 훔쳐내는 김씨. 무엇보다도 자녀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어 남편에게 ‘함께 농약 먹고 죽자’고 했던 김씨를 지켜줬던 것은 바로 둘째 딸이었다.
“둘째 딸이 울며 불며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고 해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오로지 엄마, 아빠 밖에 모르는 착한 둘째 딸, 그래서 더 미안하고 결혼도 우리 때문에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래도 김씨는 이제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김지욱 동두천장애인복지관 이사장님, 누구보다도 감사한 분입니다. 사람 상대하는 일, 말하는 법을 배웠죠. 예전에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었어요. 택시를 타고도 헤맬 때가 많았죠. 그러나 이제는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김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마운 이웃들을 잊지 않는다.
“이식 수술비용을 대 준다는 사람도, 수술 받으면 한쪽 눈을 기증해 준다는 분도 있었어요. 시신경이 말라 죽어가 수술이 불가능하지만 마음만으로도 엎드려 절할만큼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군지 절대 밝히지 않으셨어요.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