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험난했던 삶, 그러나 박동의씨는 원망보다는 ‘사랑’으로 세상과 싸워나갔다.
이제 고희를 맞는 박동의씨는 봉사로 가득한 삶의 기쁨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활자의 힘을 빌었다.
조국의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며 보내온 삶들, 부유한 결혼생활 속에 연이어 터진 불행, 그리고 봉사로 이겨낸 삶 등 한순간 한순간 지나칠 수 없었던 삶을 기록해 낸 ‘작은 보람 큰 기쁨’과 기억들을 함축시킨 시집 ‘오뚝이’가 잔잔히 서민들의 애환을 토닥인다.
한때 은행잎이 떨어져도 시상이 떠오르던 문학소녀 박동의씨가 7개월동안 낮에는 봉사로, 밤에는 글을 쓰며 펴낸 책 ‘작은 보람 큰 기쁨’을 통해 용기와 희망 그리고 조금 덜 쓰고 조금 더 나누는 봉사의 즐거움을 전하고 있다. 박동의씨는 책 판매 수익금 역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고희, 봉사로 삶을 채우다=1980년 양주시 장흥면에 정착한 것은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뜨고부터다. 부유하게 살았던 남편이 세 번의 사업실패로 시골에서 은둔생활을 한 지 몇 년째,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고 좌절감을 술로 버텨냈고 간암선고를 받은지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동의씨에게 남겨진 것은 어린 4남매와 빚. 단칸방에서 빚쟁이 독촉에 시달리며 닥치는 대로 장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청소하는 노인들, 깡통 줍는 사람들 등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게에서 따뜻한 밥 한끼라고 꼭 먹이고 보내야만 했던 박씨였다.
특히 박씨가 90년 적십자 부녀봉사회 회장이 되면서 소외된 장애인들과의 인연은 깊어졌다. 94년부터 지금까지 양주시 지체장애인협회 후원회장이기도 한 박씨는 양주시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지체장애인협회 창립식 때 초대를 받아 갔지만 내빈은 별로 없고 장애인들만 있었다고.
“나한테도 초대장이 왔는데 딴 사람들한테는 안 갔을 리가 없잖아요. 다른 행사에는 많이들 가던데 너무 하더라구요.”
그날 박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바로 다음날 적십자 회원들을 모아 장애인들을 위한 잔치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한 것이 매년마다 하고 있는 장애인 위로잔치와 동거부부 결혼시켜주기다.
남면 자립장도 빼놓을 수 없는 박씨의 기억이다. 국회의원을 찾아가 사정을 하고 그런 끝에 남면에 150여평 자립장이 올라가고 “소원을 이룬” 박씨는 신바람이 나서 수시로 반찬 등 이것저것을 가져다 날랐다.
그렇다고 박씨가 사랑을 나눈 대상이 장애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소년소녀, 독거노인 등 내 자신이 자식들 등록금 걱정에, 끼니 걱정에 잠을 못 이뤄봤기 때문에 그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양주시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양주시 바르게살기협의회 여성분과위원장, 사랑의 집짓기 이사, 양주시 고주모 협의회 부의장, 양주시 소나무 라이온스클럽 창립회장 등 무수히 많은 단체활동은 봉사로 이어졌고 오직 몸으로 행한 봉사만이 사랑을 ‘전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대를 잇는 이웃사랑=“엄마, 내가 엄마를 닮았잖아.”
몇 년전 5년동안 집에 생활비 한푼 갖다 주지 않던 셋째 아들이 한 말이다. 노숙자와 함께하며 생활하느라 그동안 생활비를 갖다 주지 못한 것이다.
2001년. 그날도 박씨는 어려운 이웃에게 김장을 해주려고 고추를 따러 갔다. 그러던 중 허리 디스크로 입원하게 되었고 감염이 돼 근육이 썩어 들어갔다. 산다는 사람은 없었다고. 봉사로 인해 어머님의 건강이 위험했는데도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어머님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큰 아들 내외는 박씨가 가는 곳곳 손발이 되어주고 둘째 아들 역시 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돈을 남겨주진 못하지만 어떤 부모인지 부모의 이름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손자손녀들이 ‘우리 할머니는 봉사할머니’라고 말해줄 때 그때가 제일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