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망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했을 때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에 빠졌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회복된다. 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깊은 상처가 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치료가 되어 잊어버리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망각은 우리를 당황케 하고 참 힘들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어느 나라든지 자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추모하고, 부상당한 상이군경들을 위로하고 감사하는 기념일을 갖고 있다. 만일 이렇게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든, 어떤 공동체든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솔직히 말하자면 ‘현충일’ 이라해도 그저 여느 공휴일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지 특별하게 애국적인 마음이나, 전몰장병들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미국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미국의 현충일을 알게 되었고, 이 현충일이 얼마나 의미 있고 특별한 날인지를 새로 깨닫고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다.
미국은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을 현충일로 기념하고 있다. 미국식으로는 Memorial Day, 기억의 날이다. 이날은 가정마다 그들의 국기인 성조기를 게양하고, 곳곳마다 포스터와 플래카드를 거는데 한결같이 “We'll never forget you"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글귀를 담고 있다. 즉 당신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라, 오늘의 이 땅,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의 참전 군인들과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은 우리도 꼭 본받아야 할 일이다. 미국에서 제일 좋은 병원은 존스 홉킨스도 아니고, 하버드 대학병원도 아니라고 한다. 바로 보훈병원, Veterans Hospital이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아프면 서울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된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바로 이 보훈병원, Veterants Hospital에서 치료를 받게 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가면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있다. 이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해마다 평균 320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오고 있는데, 그곳에는 참 감동적인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바로 프랭크 게일로드의 작품인데 비가 쏟아지는 전선을 판초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군인들의 모습이다. 참 비장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성조기 밑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 아래엔 검은 돌에 흰색 글씨로 불멸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처럼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조국의 산하에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엔군 62만 8,833명의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별히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54,246명의 젊은이를 잃었다. 실종자 8,177명까지 합친다면 62,423명이 이 땅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아들을 잃었고, 클라크 유엔 사령관도 아들을 잃었고,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도 아들을 잃었고, 워커 중장은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9군단장 무어도 목숨을 잃었고, 24사단장 딘 소장은 전쟁포로가 되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가운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이 땅에서 전사한 사람은 35명이나 된다.
하버드 대학에는 한국전에 참전했다 목숨을 바친 하버드대학 출신 병사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중 17명이 한국전선에서 전사하였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나 나올까 말까하는 ‘미국의 희망’인 인재들을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보냈던 것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지금 이 모든 사람들의 희생위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앞으로 더욱 잘 되려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과 그의 가족들을 높이 받드는 정신을 우리 국민 모두가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땅에는 아직도 6.25 전쟁당시 이름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미 발굴된 유해가 13만여 구나 있다고 한다. 경기도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금년 자그마하지만 의미가 있는 사업을 펼쳤다. 6.25전쟁 당시 이름도 없이 전사한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지역에 “평화의 쉼터”를 조성한 것이다.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이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유해발굴지역 등산로 주변 8곳(수원 광교산, 안양 수리산, 의왕 모락산, 파주 파평산, 포천 백운산, 양주 칠봉산, 가평 북배산)에 안내표지판과 더불어 벤치를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한 것이다.
기억하자. 잊지 말자.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선열들을 잊지 말자.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