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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민/외과전문의 |
출렁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일렁거리는 배를 타고,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가며 3시간 이상을 버텨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섬. 그나마 바람이 거세면 갈 수도 없는 외로운 섬.
그 섬 안에 또 외로이 자리 잡은 작은 병원. 나름 신경을 써서 유지가 되고 있는 병원이기는 하나 육지의 병원에 비하면 그 환경이 열악하여 큰 수술은 엄두도 못내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작은 수술 정도만 해낼 수 있는 규모의 병원. 하지만 수술을 할 수 있는 이 섬 유일의 병원이기에 대부분의 섬 주민들은 몸이 아프면 이 병원을 방문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전세계 축구경기로 떠들썩했던 그 해. 대략 1만여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이 섬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열기는 육지 못지 않게 뜨거웠고 그 뜨거운 기운은 작열하는 태양에 의해 더욱 달궈져 여름 내내 식을 줄을 몰랐었다.
하지만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선선해진 바람은 여름 동안 줄곧 벌겋게 달구어졌던 섬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고, 때가 되었음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등장한 가을 풀벌레의 울음소리는 온 섬을 가득 채우고 있을 즈음, 사건은 불현듯 일어났다.
이 섬에서 평생 흙을 만지며 살아온 한 노인이 허겁지겁 병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평소와 같이 밭일을 하던 중 실수로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 화근이었다. 분명 뒤로 살짝 넘어졌건만 등보다는 배가 아픈 것이 이상하여 병원에 급히 온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통이 심해지고 배가 점점 불러오더니 웬만한 임산부의 그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다행이 그동안 민관이 땀을 흘리며 일심단결하여 병원을 키운 덕분에 이 병원에서도 이것에 대한 검사는 할 수 있었다.
검사는 진행되었고,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사고에 비해 검사결과는 뜻밖으로 매우 심각했다. 운이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노인의 뱃속에 있는 췌장과 비장이 파열된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 장기들은 잘못 파열되면 무서운 기세로 피를 뿜어내어 삽시간에 뱃속을 시뻘건 피로 가득 채우고, 최악의 경우 불과 수시간 내에 과다출혈로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게 된다.
이 노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더 이상 행운은 없어 보였다. 검사결과 몸 안의 피가 거의 다 빠져나갔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마치 기름이 바닥나서 빨간불이 번쩍거리다가 서 버리는 자동차처럼.
배가 아프다고 연신 소리를 지르며 뒹구는 노인. 바삐 움직이며 아우성치는 병원의 의료진. 전화통을 붙잡고 목청을 높이는 원무과 직원들. 이들로 인해 조용하던 병원은 일순간 아비규환이 된다. 평생토록 태양에 그을려 시커멓던 그의 피부는 시든 백합꽃처럼 창백해지고, 마디가 굵고 억세기만 하던 그의 손가락은 어느덧 오뉴월 엿가락처럼 흐물대더니 급기야 의식이 가물거리며 그나마 병원이 떠나가라고 질러대던 소리마저 잠잠해진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운데, 스멀스멀 밀려온 먹구름은 하늘을 더욱 검게 만드는데, 이내 그 사이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데…. 이러한 창밖 풍경이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외과의사의 심경을 묘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