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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민/외과전문의 |
불의의 사고로 뱃속의 장기가 파열되어 서서히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고 있는 노인 앞에서 고민에 빠진 외딴섬의 외과의사.
문득 외과의사의 머리에는 대학병원에서의 달콤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대학병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응급환자가 도착하면 즉각적인 검사 후 부족한 피를 보충하기 위해 수혈을 시작하며 이와 동시에 수술실로 직행한다. 수술실에는 내로라하는 첨단장비들이 넘쳐나고 다수의 외과의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마취과 의사가 마취를 시행하면 외과의사는 즉시 환자의 배를 절개하여 출혈이 되고 있는 부위를 확인한 후, 단번에 망가진 장기를 제거함과 동시에 봉합할 수 있는 첨단기계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상황을 종료시켜버린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끈 후 외과의사는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 동안 다량으로 준비해 놓은 혈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혈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입됨에 따라 환자의 창백하기만 하던 혈색은 서서히 붉은빛으로 회복된다. 수술이 종료되면 환자는 중환자실로 바로 가 집중치료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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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한곡의 왈츠처럼 유유히 진행되어 행복하게 끝을 맺는 대학병원의 풍경은 다시금 울려 퍼지는 환자의 괴성에 의해 산산이 깨져버린다. 의식을 잃어가던 노인이 다시 깨어나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섬에서는 이처럼 자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중한 환자의 경우 해군 헬기를 요청하여 육지의 대학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 관례다.
환자가 헬기를 타고 육지 대학병원에 도착하기까지는 왕복 1~2시간이 소요된다. 헬기는 이 섬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헬기가 일단 섬에 도착한 후 환자를 싣고 다시 육지로 가게 되는 것이다. 원무과에서는 이러한 관례대로 일단 해군에 헬기 요청을 한 상태다. 하지만 현재 기상 상황이 무척이나 열악한 관계로 확답은 않은 채 논의 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겨놓은 상태다.
상황이 급하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키운 병원이기는 하지만 이 외딴섬의 병원에는 아쉽게도 대학병원에서처럼 자랑할만한 수술기구는 없었다. 칼, 가위, 집게, 실, 바늘…. 작은 수술이라면야 능히 해치울 수 있는 기구들이지만 지금과 같이 제법 큰 수술을 하기에는 많이 허전하다.
더군다나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의사라면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외과의사는 강호의 경험이 없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던가. 그야말로 잘 차려 놓은 밥상에서 밥을 먹을줄만 알았지 스스로 밥상을 차려본 적은 없었기에 처음 접해보는 이러한 부족한 환경 속에서 수술을 진행하기에는 자신감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순식간에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는 한없이 든든한 그 기구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수술이 잘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당장 준비된 혈액이라고는 한방울도 없는 여기서 어떻게 환자의 모자란 피를 보충할 것인가. 이대로라면 수술 도중 노인이 사망할 수도 있어 보인다. 또한 수술 후 기력이 쇠한 노인을 지켜줄 중환자실이 없으니 이것도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다. 수술 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도 외과의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이때, 해군 측에서 연락이 왔다. 기상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일단 헬기를 띄울 수 있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정말 고마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상황은 급반전되어 모든 과정이 환자 후송을 위한 쪽으로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이 노인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이대로라면 육지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사망할 가능성마저 있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