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쯤 일이었다.
“이어폰을 두 귀에 꼭 끼우고 열심히 연습하라구요. 이번 부활절 칸타타에서는 아빠의 역할이 제일 크니깐. 아빤 목소리는 참 좋은데 그 박자 감각이 무딘 게 큰 흠이에요. 알았죠?”
아내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김가다는 부활절 칸타타곡을 연습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너주레하게 굴면 나 하나 때문에 칸타타 망친다 망쳐.”
김가다는 광장시장 단골가게 조그만 의자에 구부리고 앉아 물건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며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악보를 펼쳐놓고 열심히 연습했다. 그 모습이 하도 열심인 것처럼 보였는지 단골가게 주인이 음료수를 내어놓기까지 하며 격려해주었다.
“들면서 하셔. 글만 쓰는 게 아니구 음악도 하셔?”
“음악을 하기사 뭐...그냥 남들 부르는 대로 따라하는거야.”
그때였다. 아주 잘생긴 여자 둘이서 지나가다 말고 그런 김가다를 한참동안 내려다 보더니 한 여자가 김가다에게 너부시 물어왔다.
“저...아저씨 성가연습하세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부활절 칸타타 연습!”
“멋있어요. 홀로 악보를 보고 열중하시는 모습이 너무도 감동적이에요. 우리랑 점심 함께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조오기 녹두빈대떡집이 맛이 참 훌륭해요.”
“그, 글세요. 처음 뵙는 여자분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괜찮아요. 감동먹은 우리가 그쯤 쏘는 것 별것 아니죠. 가실까요?”
김가다는 보던 악보와 가방을 단골가게 한쪽에 둔 채로 주첨주첨 그녀들을 따라 나섰다. 세사람은 녹두빈대떡집 좌판에 나란히 앉았다. 김가다는 속으로 그 두 여자가 참 멋지게 생긴 여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한 여자가 녹두빈대떡을 한접시 푸짐하게 시켜놓고 막걸리도 한병 주문했다. 그녀가 김가다에게 막걸리를 한잔 권했으나 김가다는 한사코 마다했다.
“저녁에 연습이 있어서 못마십니다.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교회에 갈 순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 꽃뱀에게 한번 톡톡히 당한 경험도 있고 해서 처음엔 그 여자들을 내심 경계했으나 말을 여겨들어보니 결코 꽃뱀은 아니라고 확신한 김가다는 적이 안심했다. 한 여자가 김가다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OO보험회사 직원이었다. 김가다는 고맙게 잘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단골가게로 돌아왔다. 보험을 계약해주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보기드문 미인들에게 녹두빈대떡 대접을 받은 기분이 참 좋았다. 순간 김가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가다가 약간 욱지른 목소리로 종업원에게 다그쳤다.
“엉? 내 가방이 없네? 이봐 총각 여기 내 가방 치웠어?”
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황당해했다. 순간 김가다는 머리가 아뜩해지는 느낌이었다.
“소설 원고뭉치도 있고, 주민등록증에다 통장에다 10만원짜리 수표에다 바이블도 들었고...”
곧 가게주인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CCTV를 검색해보았다. 어깨가 한쪽으로 조금 거우듬한 영감님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김가다의 가방을 들고 총총히 사라지고 있었다. 김가다가 의자에 털썩 내려앉으며 가슴으로 한탄했다. 간단하게 사양했으면 될 일을 여자들의 미색에 이끌려 타달거리며 따라간 결과가 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젠장, 여자 쳐다보다가 졸지에 '개같은 날의 오후'된 게 벌써 몇 번째야...”
언젠가 막차를 탔을 때도 그랬다. 서있는 사람들 틈사이로 언뜻언뜻 마주보이는 곳에 앉아있는 아가씨를 무심코 쳐다본 김가다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다리를 연신 이리저리 포개얹고 있는 아가씨의 짧은 치맛자락 속에서 살색 팬티가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가다와 눈이 딱 마주친 여자가 살짝 윙크까지 던져주는데는 골에서 지진이 날 정도였다. 전철에서 내린 김가다는 그예 궁금증을 견디다못해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 여자를 찾았다. 순간 그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건물의 쇠기둥에 이마를 호되게 부딪치고 말았다.
“딱!”
금새 코에서 코피가 쪼르르 흘러 내렸고 이마에서는 찐득찐득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아그! 이, 이런 여자 쳐다보다 이게 뭔 꼴이야 진짜루...”
또 언젠가는 광장시장에서 물건을 주렁주렁 매달고 전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진짜 텔런트 뺨칠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던 김가다가 그만 계단을 한층 헛디뎠고 그는 여지없이 지하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청년들이 달려와서 김가다를 일으켜 세웠다.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참혹하게 팽개쳐져 있었다.
“아흐! 괜시리 여자 쳐다보다가 뭔 꼴이야 이게. 아흐...”
또 언젠가도 의정부시장에서 꽃뱀한테 걸려 쇠갈비에다 맥주 스무병 값을 낼 돈이 없어 마누라가 큰 맘 먹고 사준 가죽잠바랑 조끼까지 식당주인에게 빼앗기고는 발발 떨면서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하마처럼 맥주 스무병을 자기 혼자 다 마셔놓고 털썩 김가다에게 덤터기를 씌워놓고 내뺀 것이었다. 그날 밤 김가다는 영락없이 마누라에게 쫓겨나 노숙자 신세가 될뻔 했었다.
또 20여년전 회암리에서 돼지랑 개를 키우고 살 때였는데 인근 부대에 면회온 멋진 아가씨쪽에다 한눈을 팔고 가다가 자전거에 짬밥통을 실은채 다리 아래로 떨어져 마빡에 사쿠라꽃이 만발했던 때도 있었다. 정말 잘생긴 사람이라면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고 감탄을 토해내는 게 김가다의 습성이었다.
하여튼 김가다는 여자쪽에다 한눈 팔다가 개피 본 예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았다. 오늘만해도 그랬다. 사실 부활절 칸타타 연습하는 모습에 여자들이 감동을 먹어서 김가다에게 은근히 접근한 것이 아니라 어떡해서든 김가다를 꼬셔서 보험하나 따내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제 혼자 흔희작약해서 그녀들을 타달타달 따라나서는 바람에 결국 가방을 도둑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두 여자가 코빼기가 사지코였다거나 얼굴이랑 몸매가 도라무통 같았어도 김가다가 여자들을 선뜻 따라 나섰을까. 그렇다고 김가다가 허구한날 마누라 몰래 논다니들과 고추박이 짓이나 하고 돌아다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쨌거나 마음이 몹시 상했지만 김가다는 또 귀중한 삶의 철학 한가지를 깨달았다.
“정치가는 정치에, 과학자는 과학에, 교육가는 오로지 교육에, 영화배우는 배우되는 일에,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살리기에, 목사는 영혼 구하는 일에 모두들 한눈 팔지 말고 앞으로만 똑바로 걸어간다면 나라가 왜 요모양 요꼴일 것이며 나처럼 졸지에 마빡에 사쿠라꽃 피울 일 없지...글쟁이는 글이나 열심히 써서 불쌍한 백성들 답답한 가슴이나 시리게 할 일이지 쓸데없이 곁길로 빠져 정치에는 왜 끼어들어? 쥐뿔이나 뭘 안다고. 애그 딱두허지.”
사람들이 모두 제 갈길을 마다하고 엉뚱한 곳에 한눈 팔고 욕심에 눈이 멀어 샛길로 나가다가 모두들 오그랑 쪽박차고 풍찬노숙하다가 결국엔 땅보탬이나 되고 만다고 김가다는 생각했다. 가방에 든 원고뭉치가 너무도 아까웠지만, 주민등록증이랑 통장 등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정작 가슴이 쓰리고 답답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또바기로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직도 교회 문턱이나 밟고 다니는 엉터리 크리스챤인갑다...”
가방을 메고 다녔던 허전한 어깨가 마음의 짐 때문에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길 옆 과일장수 가게에서 몇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었다. 김가다가 잠깐 걸음을 세우고 TV를 한참 보다말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또 한사람이 곁길로 나가누만. 국민을 위해 위대한 정치의 새장을 열기 위해서 말이지... 거기다 대고 노가다는 보따리 정치한다며 딴죽을 걸고...봄날은 제 갈길로만 가는데 저 사람도 자칫 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마빡에 사쿠라꽃 필라...그나저나 저 놈의 자시지벽이 어느 때나 깨어질까. 애그 댁덜두 참 딱허우, 쯔쯔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