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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민/외과전문의 |
그들은 대략 10명 남짓의 푸른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었다(정확히는 군복무 일환으로 섬에서 근무 중인 수비대원들). 하나같이 앳돼 보이는 얼굴의 그들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짜고짜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들은 노인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서슴지 않고 나눠주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개중에는 그저 등 떠밀려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뭇 진지하고 비장한 빛을 띠고 있는 그들의 눈은 그러한 경솔한 생각을 한방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즉시 이들의 핏줄선 팔뚝에 주사바늘이 찔려졌다.
그와 동시에 붉고 뜨거운 피가 솟구쳐 나왔으며, 신선한 피는 지체 없이 노인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가 싸늘하기만 하던 노인의 온 몸을 사정없이 녹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꺼질듯 비실거리던 노인의 심장박동 소리는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군인들과 노인의 혈관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된 셈이었다.
빗줄기는 더욱 강해져 온 섬에 물끓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고 간혹 번쩍거리는 번개에 수술실 무영등은 껌뻑껌뻑댔다. 마취과 의사의 신속한 마취 이후, 즉시 칼날이 배를 가르자 붉은 피가 솟구쳐 나왔다. 하지만 우리의 소심하고 나약한 외과의사는 의외로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왜일까. 수술 직전 할머니의 눈을 통해 비로소 인간 존재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흘깃 훔쳐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터진 상수도관처럼 붉은 피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의사는 담담하게 흥건한 핏물을 헤치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출혈 부위를 집게로 막았다. 그러자 출혈은 거짓말 같이 멈추었고 수술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불이 일단 꺼진 것이다. 이후로는 한층 여유있게 수술이 진행되었고 결국 만족스럽게 마무리됐다. 평소처럼 소심하던 우리의 외과의사였다면 기대하기 힘든 결과였을지도 모르지만 인간 내면의 ‘무한의 바다’를 훔쳐 본 지금,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기에 성공적인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피로에 절어 벌게진 의사의 눈에 젊은 피를 다량으로 수혈 받은 노인의 발그레 상기된 얼굴이 들어온다. 기분탓일까. 10여 젊은이들의 붉은 피를 이식받은 노인은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노인이 말을 꺼낸다. “나, 살았소?” 이에 의사가 맞받아친다. “살다뿐입니까? 젊은이들 피주사 맞고 10년은 젊어졌네요.” 의사의 썰렁한 농담에 일순 적막이 흐르더니 이윽고 의사, 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껄껄거리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온 병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노인의 부인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 다시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간 내부의 광활하고 무한하며 선악에 대한 모든 논쟁을 녹여버리는 무조건적인 순수의 바다를 흘깃 훔쳐본 이후 일시적으로 잠재워졌던 ‘에고의 유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본래의 기세를 되찾아 갔고, 그에 따라 다시금 존재의 본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겹겹이 장막이 덧씌워진 채 왜곡되고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의 본질을 숨길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는 법.
밉던 곱던 전적으로 신뢰의 말을 건네 준 환자의 부인, 악천후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날아온 헬기조종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피를 기꺼이 선물한 이 땅의 젊은 아들들…. 비록 지금도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흐느적거리며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간혹 문득문득 그 시절 그들을 회상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무한하고 불변하는 진정한 본질은 달리 먼 곳도 아닌 바로 나의, 우리의 내면 속에서 항상 불타고 있음을 느끼며 다시금 위안을 찾아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