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해 같았으면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로 마음이 들뜨는 12월이었을 것인데, 갑작스런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으로 국내외 정세는 혼란스럽기만하다.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북한의 권력 승계 양상에 온 관심이 몰려지고 있어 그나마 평온한 시기에도 잘 모르고 있는 두 분의 애국자의 의거가 그대로 뭍혀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재명 의거와 나석주 의거가 그것이다.
이재명 의거는 1909년 12월 22일에 일어났다. 이재명 의사가 을사오적 중 한 명이자 내각 총리대신인 이완용을 칼로 찌른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경에 의해 체포, 그 이듬해에 사형당한 분이다.
이재명의사는 평안북도 선천 출생으로 미국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갔다가 미국 본토로 건너가 안창호 선생이 중심이었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항일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공립협회가 매국노를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자 의사는 자원 귀국해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침략의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계획을 추진했다.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평안도 순시에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평양역에서 거사를 준비했으나 순종황제의 안위를 걱정한 안중근 의사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하다가 그해 10월 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귀국한 이후 을사오적 처단에 나섰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 처단 책임을 맡아 기회를 엿보던 중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고 성당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해 기다리다가 제지하는 인력거 운전수를 제치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허리와 어깨 등을 찔렀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목숨을 부지했으나 이재명 의사의 민족적 기개는 법정에서도 유감없이 표출되어 민족대중을 각성시켰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9월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으니 이때 의사의 나이 23세였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명동성당 입구에는 `이재명 의거터'가 표석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 다른 한 분인 나석주 열사는 1926년 12월 28일 일본의 경제침략 본거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던 중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장렬하게 자결하신 분이다.
나석주 열사는 최후의 순간 이렇게 절규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쉬지 말고 분투하라"
나석주 열사는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여 1913년 간도로 이주했고, 간도에 있는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여 국내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그러다가 항일무장 저항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6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중국인으로 위장한 채 국내에 밀파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28일 조선식산은행 등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을 벌인 끝에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하였다.
나석주 열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고, 명동의 동양척식회사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에 비해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희생에는 그 가치의 값의 차이가 있을까?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느라 바쁜 12월에 잊혀지기 쉬운 이재명의거와 나석주의거를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