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용의 해 임진년(壬辰年)이다. 60갑자 중 하나, 임진=12지의 용은 방향으론 동남동, 시간으론 오전 7~9시, 음력 3월을 지키는 방위신이요, 시간신이다. ‘갑을병정(甲乙丙丁)…’으로 이어지는 10간과 ‘자축인묘(子丑寅卯)…’로 이어지는 12지가 갑자(甲子)부터 순서대로 돌아가며 짝을 짓는다.
양의 수는 양의 수끼리, 음의 수는 음의 수끼리 만나기에 120갑자가 아닌 60갑자가 순환하는 ‘흑룡(黑龍)의 해’다. 흑룡이란 복과 용기 난세를 함께 부른다. 흑룡은 임금 대권 승천(昇天) 전쟁 불안의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임금을 상징하는 흑룡의 해에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훌륭한(용은 ‘등용(登龍)’이라는 말로 표상되는 신분상승) 사람이 된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따라서 용의 해는 갑진(甲辰)·병진(丙辰)·무진(戊辰)·경진(庚辰)·임진(壬辰) 5종이 순서대로 12년에 한 번씩 나타난다. 진(辰)과 만나는 글자 중 임(壬)은 오행에서 물(水)이요 색깔로는 검은빛(黑)이다. 임진년을 소위 ‘흑룡’의 해라고 일컫는 이유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용의 변화무쌍한 하늘에 구름이 둥둥 떠다니면서 빗자루로 쓸어내듯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만나고 흩어지고 다시 하나됨으로써 우주는 탄생한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순수추상에 마음의 문을 열고 귀기울여보라. 구름 빛에서 쏟아지는 영원의 울림을 들을 수 있으리라. 우리는 문화예술의 도시, 애향의 도시, 역사의 도시 의정부·양주에 사는 것으로 임진년의 희망을 본다.
인간은 의식주가 해결되면 권력을 탐하고, 예술의 길을 갈구하게 된다. 문화예술이란 인간의 마지막 자기의 영원과 모습을 그려보고자 하는 것으로 인간 본성의 표현이며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이 휘갈겨 쓴 글씨마저 영원의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큰 불멸과 작은 불멸이 있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 ‘불멸’에서 말했다. 작은 불멸이란 사람이 죽은 뒤 그를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들 사이에서 추억과 회상으로 남는 불멸이다. 큰 불멸은 위대한 인물이 죽은 뒤 그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위업과 작품으로 길이 기억되는 불멸이다.
새해 임진년은 문화예술인의 막중한 한해가 될 것이다. 역사의 한 장으로 살펴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임진왜란 1592년 4월13일: 일본은 21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입한다. 명나라의 ‘분할역치(分割易置)’ 발상이 그것이다. 왜군이 평양성까지 북상하니, 혹시 북경까지 치고 올라올까 봐 위협을 느낀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반으로 나누어(分割) 일본에 넘겨주고, 임금(선조)을 교체해야 한다(易置)는 복안을 구상했었다는 것이다. 대략 한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남쪽인 전라, 경상, 충청, 경기 남부는 일본에 할양하고 북쪽인 함경, 황해, 평안, 강원도는 명나라가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었다. 남북분단은 이미 4백년 전에 우리도 모르게 명(明)·왜(倭)의 협상테이블에서 은밀하게 논의되었던 것이다. 물론 직접 당사자인 조선은 테이블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가 420년전 임진년이었다.
북한 통치세력의 변화로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미(美)·중(中)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새해 임진년에, 우리의 문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곱씹어 보고 국익에 상응하는 활동의 무대를 만들어 나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그 파급력을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재가 모두 대가인 것은 아니지만 글, 화서에 남다른 천재성을 보이는 문인과 화가는 분명 따로 있다. 문인화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시는 세속을 훌쩍 뛰어넘는 빼어남이 있다면 “문인화의 격조를 갖추었다”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간략하면서도 담박하여 자못 문인화의 격조를 갖추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간결한 구도에 스스럼없는 필치로 단 몇분만에 그려낸 것 같은 작품이지만 사의(寫意)가 역력하여 선미(禪味)조차 감돈다면….
그러나 이 행복에 안주하지(settle for happiness) 말라. 의미 없는(devoid of meaningfulness), 사회정의에 대한 꾸준한 헌신이 없는(free of steady commitment to social justice) 개인적 성공은 황량한 인생(a barren life)에 불과하다. 하찮은 인생(a trivial life)이 되고 만다. 좋은 일을 하는 대신 좋아 보이기만 하는(be looking good instead of doing good) 존재로 끝난다. 그런 그림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자칫 객기가 드러나 추하게 되고 만다.
손대는 일마다 술술 풀려 세상이 다 내 것처럼 여겨질 때 겸손해지기란 정말 어렵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지만 그래도 문화예술인들은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문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우리의 고향 옛 양주(의정부, 양주, 동두천)시에 수많은 문인과 화성이 계셨고, 죽어서 정주의 땅으로 잠들어 계신 분 중 한분의 기억을 살려보자. 동양의 화성 중 한분이신 畵聖 謙齋 鄭敾(1676~1759) 本官 光州 號 謙齋 자 鄭敾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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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畵聖 謙齋 鄭敾(1676~1759) 인왕제색도 |
겸재는 원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연로하여 10대에 이미 도화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중인이나 상인계급 출신의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그림의 화풍이 겸재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양반 출신으로 도화서원이라는 기술직을 맡은 겸재는 그렇기에 꼼꼼한 필치로 외형 묘사에만 주력하는 직업적 화가들의 공필보다는 일반 사대부들이 여기로 그리는 남종화풍의 문인화에 더욱 끌리게 된 듯싶다. 인격과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수묵 담채로 내면세계의 이른바 사의를 중요시한 격조 높은 훌륭한 예술가란 모든 사람과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들추어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일까? 겸재 정선은 산의 나라 한국,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산에서 해가 뜨고 산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사는 ‘산의 나라’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 가운데서, 처음으로 이 땅의 산을 그린 화가로 훌륭한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 된다. 한국 산수의 참된 모습, 동국진경을 주제로 그린 진경산수의 거장으로….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진경’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사경’이라기보다 차라리 ‘사의’다. 굵고 검은 선, 짙은색의 주조, 강렬한 농담의 대조, 그리고 물결치듯 굽이치는 산봉우리와 계곡과 안개가 중첩하는 역동감은 서양회화사의 에밀 놀데, 죠르쥬 루오, 막스 베크만 등의 레알리즘보다는 엉뚱한 비약일지 모르나 20세기초의 표현주의 화풍을 선구적으로 예시한 것처럼도 보이기도 한다.
한국화는 자연의 숨소리를 빼고 논의할 수 없다. 보는 공부인 미술이 자연을 보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성 겸재 정선의 선조 분은 양주 산북동 샘내에 정주공간에 머무르시고 겸재 정선 또한 옛 양주(도봉구 방학동)에서 300년의 세월에도 예술의 천성을 기르며 한강 북쪽의 양주(군)시지에 계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만한 예술문화인들은 없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다시 겸손해질 때 문인들이 글자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황제 이름에 들어 있는 글자나 황제가 싫어하는 글자를 문장에 써 지식인이 화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 문자옥(文字獄)이라고 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황제가 되기 전 거지와 도둑질을 전전하다 절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새 황제 주원장에게 아부하느라 ‘천생성인 위세작칙(天生聖人 爲世作則)’이라는 문장을 만들어 바쳤다. “하늘이 성인을 낳으시어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좋은 문장이 화를 불렀다. 중국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과거시험에 “유민소지(維民所止)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백성이 머무는 곳’, 그러니까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쓰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화를 불렀다. ‘유(維)’는 옹정제 이름 옹(雍)에서 머리를 뺀 것이고 ‘지(止)’도 정(正)에서 맨 위 한 획을 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황제를 우롱한 죄로 출제자는 붙잡혀 옥사하고 자식들까지 처형됐다.
주원장은 글에 나오는 ‘생(生)’이 은연중 승(僧)을 떠올리게 해 자신이 절에 있었던 것을 비웃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작칙(作則)’의 칙(則)은 도둑을 가리키는 ‘적(賊)’과 발음이 비슷하니 자신이 세상을 도둑질했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또 다른 문인은 ‘천하유도(天下有道·천하에 도가 있다)’라는 문장을 썼다가 죽임을 당했다. ‘도(道)’가 도둑을 뜻하는 ‘도(盜)’를 암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첨예한 대립을 파괴한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감행하였고 목숨을 걸고 이에 매달렸다. 탄압과 회유를 뿌리치고 집념으로 일관하였다. 선조 문인들의 성품은 어떤가. 온화하고 겸손하며, 솔선수범(率先垂範)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공사(公私) 구분에 철저하였고, 자기 측근이나 대변한 적이 없다. 공동의 가치관을 설파하였으나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지 않았다. 여론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처신을 바꾼 적도 없다. 안색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박해하는 상대를 향한 적개심도 자제하였다. 대의(大義)를 위해 민족과 종교의 차이를 포용하는 아량을 보였으나, 원칙에 벗어나는 일에는 결벽증세를 보였다. 이렇듯 문화예술인들의 신은 우리 상식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문화인의 자부심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만났던 동남아 국가지도자는 한국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경제성장과 올림픽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되물었더니 아니라고 하였다. 식민탄압이 극에 달하면 ‘만세(萬歲)’로 응답하고, 통치국의 수뇌(首腦)를 저격하는 의사와 열사가 줄지어 나오고, 열세인 독립군이 강대국의 정규군을 궤멸시킨 민족혼(民族魂)이 부럽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기도 의병대장 정용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1910년 사형 당시) “나라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내가 죽어 귀신이 되어서 일본 망하는 것을 꼭 보리라.” 경기(양주)의 독립의병장(묘, 남면)의 당당한 모습을 새겨보면서 글은 문화예술인들의 촉각에서 시작된다.
송나라 때 소식(蘇軾)이 아우 소철(蘇轍)에게 화답한 시는 이렇다.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한가. 기러기가 눈 진흙을 밟는 것과 흡사하네.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았어도, 날아가면 어이 다시 동서를 헤아리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이 되어 섰고, 벽 무너져 전에 쓴 시 찾아볼 길이 없네. 지난날 험하던 길 여태 기억나는가? 길은 멀고 사람 지쳐 노새마저 울어댔지.(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君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인생은 백년지기지만 문화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이다 글은 무서운 존재다
“세상맛에 푹 빠지면 바쁨을 구하지 않아도 바쁨이 절로 이르고, 세상맛에 덤덤하면 한가로움에 힘쓰지 않아도 한가로움이 절로 온다(世味濃, 不求忙而忙自至; 世味淡, 不偸閑而閑自來).” 명나라 육소형(陸紹珩)이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에서 한 말이다. 관심이 밖으로 향해 있으면 바쁘단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마음이 안쪽으로 향해야 비로소 한가로울 수 있다. 바쁘기를 구하는 것[求忙]과 한가로움에 힘쓰는 일[偸閑]의 선택은 세상일에 대한 관심 정도에 달린 것이지, 내가 도시와 시골 중 어디에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청나라 사람 주석수(朱錫綬)가 말했다. “고요에 익숙해지면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바쁨만 쫓다 보니 하루가 너무 짧다. 책을 읽으면 하루가 아깝게 여겨진다(習靜覺日長, 逐忙覺日短, 讀書覺日可惜).” ‘유몽속영(幽夢續影)’에 나온다. 거품처럼 허망한 바쁨을 쫓지 말고, 내면에 평온한 고요를 깃들이라는 말씀이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조 한 수.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이라도 꿈이라건만, 여름날 하루해가 그리도 길더구나.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나니.”
문화예술인들은 조바심을 버리고 글에 대한 독성을 버려야 좋은 글과 말이 이어질 것이다. 자부심과 인프라, 경험과 실적을 재구성하여 세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에서 비전을 찾아야 한다. 넓게 보고 멀리 보면 비전이 산적해 있을 것이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젊은이들에게 포부를 갖도록 도와주고 감싸주고 지켜주는 것이 희망이다. 목록을 작성하며 주변의 문화예술인을 찾는다면 임진년은 문화예술인의 한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