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나무 한 그루 없어도, 차의 성지가 될 수 있는가? 그곳이 양주문화권이라면, 대답은 ‘yes’다.
현재 양주문화권은 서울시를 둘러싸고 있는 경기북부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기후와 토양의 특성상 차 재배지는 아니다. 차가 심겨진 일도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차의 소비지요, 차문화의 꽃을 피운 지역이요, 차 매니아들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다.
양주문화권에 처음 차와 차문화가 소개된 때는 고삼국시대부터다. 옛 양주라 하면, 임진강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이다. 즉 한반도 중부의 노른자위 권역이다. 그래 양주땅의 향배에 따라 한반도의 패권이 결정되었다. 고구려의 전성기가 언제였던가? 양주를 가졌을 때다. 백제가, 신라가 또한 그러했다.
한반도에서 중부권 개발이 중요시되자, 옛 양주에서 독립한 첫번째 시가 서울이다. 그래서 한양 조씨나 양주 조씨는 한성 한본이다. 뒤이어 양주땅에서 독립한 시가 의정부요, 동두천이요, 구리요, 남양주가 된다.
동대문 밖이 다 양주땅이요 뚝섬도 양주땅이었으니 서울시에, 고양시에, 하남시에 덜어준 몫이 또 적지가 않다. 그리고도 여전히 양주시가 남아 있다. 그러니 감사로는 평양감사요, 목사로는 양주목사라 한다. 허니 옛 양주땅에 차인이 없었겠는가, 차문화가 없었겠는가, 차가 없었겠는가?
차문화가 쇠퇴했다는 조선조 중후기만 해도 양주문화권은 여전히 차문화의 산실이요, 정화라 해도 손색이 없다. 다산 정약용만 해도 그렇다. 하이틴 시절에 이미 차시를 남기기 시작한 그는, 초의를 비롯한 남도의 스님네와 유생들에게 차를 알리고 제다법을 가르쳐 생산토록 했다. 그러한 내역은 귤산 이유원이 이미 당대에 고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유원 당자도 중국차 일본차를 비롯한 국내외의 차에 해박한 식견을 가졌던 차 매니아라고 할 수 있다. 한강변에 지어 놓은 그의 개인 찻집은 많은 차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국 차계의 대부라 불리웠던 해거재 홍현주는 어떠한가? 정조의 사위요 보이차를 아꼈던 그는 또한 초의차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초의가 쓴 불후의 저술 ‘동다송’ 역시 그에게 헌정된 책이 아니었던가? 하긴 초의마저도 고향을 떠나면, 양주문화권이 그 순례의 주요 여정이었으니.
불가라 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절집의 차문화를 논할 때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 등이 주석한 양주 회암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는가? 회암사는 선차일여(禪茶一如)의 일상사가 펼쳐진 대가람이요, 한 잔의 차로 법거량을 나누던 도도한 선풍의 도량이지 않은가.
양주 백석 작은오미에 차문화박물관을 연 것은 그러한 맥에 연이 닿아 있다. 근대화 과정과 한국전쟁의 상흔이 어느덧 이 지역을 문화 전반의 불모지요, 차문화의 멸실지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선인들의 차풍류와 법도가 어디 가겠는가. 양주문화권 백성들의 유전인자에 이미 차의 낙인이 찍혀있는 것을. 알다시피 차의 주요 생산지라 해서 차의 성지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좋은 차를 알아주고 즐기고 찬연한 차문화의 정화가 피어나는 곳, 그곳이 곧 차의 성지가 아니겠는가.
지난해 문을 연 차문화박물관에는 내외의 여러 손님네들이 다녀갔다. 일본 녹차의 주요 산지인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에서는 일본차 인스트럭터협회 임원들이 방문하였다. 정기적으로 차문화 교류를 하자는 것이다. 올해는 일본에서 한국차와 한국의 차문화를 소개하는 물꼬가 열릴 것이다.
이스라엘 사업가 야곱은 유대인으로서는 첫 한국인 차제자라는 것에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인도 중국 등지에서 차에 관심을 가진 교포와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와 몇 시간씩 차를 마시다 가는 미국인 관광객들도 점차 느는 추세다. 최근에는 차문화 체험학습을 테마로 일본 관광객들의 유치가 전문 여행업체에 의해 타진되고 있다.
옛 양주땅 혹은 양주문화권이 차문화의 변두리에서 성지로, 한국을 대표하는 차인들의 터전으로 이전의 명성을 되찾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