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의 새벽 아슴푸레한 도로에 희미하게 그려지는 붉은 금…. 쇠사슬로 묶인 채, 달리는 트럭에 매달려 사라져가는 주인공의 처절한 속죄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각인되어 나는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 앞에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함께 본 친구는 영화가 갖는 잿빛 어두움과 극한의 잔혹성 때문에 불편하다고 하면서도 세계가 주목할 수 있는 영화라는 데에는 공감했다.
그는 감독 김기덕을 미친 예술가라고 부르면서도, <피에타>가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만 아니라 동 영화제 기간에 ‘골든 마우스상’, ‘나자레이 타데이상’, ‘젊은 비평가상’까지 휩쓸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피에타>는 충격적이고 멋졌다.
<피에타>는 원금의 열배나 되는 채무를, 사고를 입혀 상해보험금으로 받아내는 사채업자의 해결사로 일하는 인물과, 청계천에 밀집한 낙후된 작은 공장-철공소, 주물공장, 프레스공장들을 배경으로 설정하여 비인간적인 세계의 극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그러니 이 영화의 사건들은 보나마나다. 몇 푼의 돈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 돈 때문에 냉혹하게 손이며 발이 잘려나간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물기라고는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버석거리는 비정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도 미치지 못하니 영화를 본 관객들이 <피에타>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청계천의 상점·상점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복수를 위해 위장해 들어온 엄마를 강간하고, 시신을 덮어준 옷을 빼앗아 입고, 트럭에 매달려 아스팔트에 갈리고….
그런데 예술성이 강한 영화를 볼 때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줄거리를 따라가며 이해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면 대부분 실패한다. 어떤 영화는 특별한 줄거리 없이 배경만 두드러질 때도 있고, 생략과 비약이 심하여 난삽해 보이는 사건들이 병치 또는 교차될 때도 있다. 상징성이 강한 사건으로 대사를 대신할 때도 있고, 어느 부분을 뭉텅 잘라내고 영화를 시작하거나 끝낼 때도 있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남들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그 장면들 때문에 이 영화에 심취하였다. 비좁고 낙후된 청계천 작은 공장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그 뒤의 자살, 복수를 하겠다는 엄마. 이것들은 감독이 깔아놓고 싶은 삭막한 인간관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물기가 돌기 시작하는 곳은 어머니를 강간하는 장면이다. “당신이 내 엄마라면 내가 나온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남자 주인공의 절규. 그곳이 사막에서 동물보다 더 처절한 고독으로 살아온 한 인간이 본향을 갈구하며,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는 U턴의 출발점이다. 미친 감독은 엄마라는 여자를 강간하게 함으로써 모태의 태반 위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한 사내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라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엄마’라는 단어에 매달려 시신을 덮었던 스웨터를 빼앗아 입으며,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가는 한 남자의 꽉 채워진 빈 가슴. 끝내는 남편과 불화하는 위태로운 한 여인의 구원을 위해 속죄하며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다 자신의 살과 피를 바치는 한 사내의 통한과 인간애. 그 아슴푸레한 핏자국을 드러내며 곧 날이 밝겠지 싶어 한동안 일어서지 못하는 내 눈에 피와 살을 나누지 않고도 서로 손잡고 자리를 뜨는 젊은이들이 가득 들어왔다.
<피에타>는 ‘비탄’ ‘슬픔’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인데, 성베드로 성당에는 동명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성모마리아상 위에다가, 속죄와 구원을 위해 아스팔트 위에서 스스로 스러져간 한 사내를 가슴에 안은 <모성의 피에타>를 하나씩 보태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