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을 낳고 부모의 심정을 깨닫고서도 말과 행동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그 소중함과 감사함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미 그 때는 늦어버린다.
내가 그러했다. 간경화와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7년간 투병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 그 때는 이렇게 식구들을 힘들게 할 바에야 얼른 돌아가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랑한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은 그저 머리가 크기 전 어버이날 때에만 부끄럽고 소심하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했던 통과의례였을 뿐이다.
이제는 병들어 계시던 아버지라도 잠깐이나마 뵈었으면 여한이 없다. 어느새 나보다 작아져버린 아버지의 몸을 힘껏 안아드려 봤으면... 여느 부자들처럼 다정하게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어봤으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큰 소리로 외쳐봤으면... 하지만 공허한 바람일 뿐이다.
다가오는 27일은 정전협정 60주년이자 UN군 참전 60주년이다. 정부에서는 참전국 대표와 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국가적인 행사를 준비 중인데 최근 이런 우스운 질문을 받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IT혁신을 주도하는 대한민국에서 도대체 과거를 따지고 돈 들여서 기념행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독일의 과거사 청산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지체 없이 히틀러 정권 시기의 전쟁 범죄자를 처벌한 것을 시작으로 반세기가 넘는 동안 대국가적인 사과와 배상금 지불을 통해 잘못된 과거사 청산을 이어오고 있다.
단순한 반성과 배상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 폴란드 등 주변의 전쟁 피해국들과의 논의를 통해 잘못된 역사서술까지 바로잡았다.
또한 유대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반성의 차원에서 홀로코스트 추모비 등을 세우고 피해자보상법을 제정해 정당한 보상을 해주고 있다.
주변국들이 잊으려고 하는데 오히려 독일 자신이 이를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끝없이 세계에 전달하고 있다. 이는 일본과 비교되어 역사청산으로 국격을 높인 대표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독일의 경우 과거사의 청산은 본인들의 부끄러운, 잘못한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를 통해 국가적 위상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염려도 있겠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잘못한 과거에 대한 명확한 진실 규명과 대내외적인 반성의 표시가 오히려 자국의 위상을 높여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이제 세계는 그들을 전 세계를 피로 물든 악당이 아니라 과거를 반성하고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깨인 생각을 가진 선진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이름도 모르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젊음을 바친 수많은 UN참전국 용사들이 온다.
이들에게 우리는 어떠했는가. 그동안 국가보훈처의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 전달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감사의 마음 전달에는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27일이 중요하다.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공식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저 독일처럼 우리가 고개를 숙일수록 대한민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일본을 우리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렇다. 그들의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를 도와준 국가에 제대로 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 한 우리도 분명 잘못을 했다. 잘못한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과거사 청산의 한 축이라면 우리를 도와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전달도 또 다른 과거사 청산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껏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 한 것이다. 외채보다 더 부담스런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젊은 시절 이 땅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 참전용사들이 이미 많이 돌아가셨고 그나마 살아계신 분들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다. 그 분들이 모두 돌아가신 다음에 뒷북을 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사랑과 존경의 표현을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27일의 대국가적인 참전국 재방한 행사는 우리 모두에게 고맙다. 정부 차원에서 잘 준비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것만으로 빈 칸이 모두 채워지지는 않는다.
국민들의 성원과 동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국민들이 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하나 된 마음의 전달...그것이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