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어느날, 고추 밭에서 풀을 뽑고 있던 김가다는 우체부가 전해준 의정부법원 소인이 찍힌 봉투를 받아들고 눈앞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하아니 이게 뭐야? 가압류 오천만원! 채권자는 김윤정? 하아니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대체 이게 어찌된 사연이야!”
김가다는 예의 채권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양주땅에서 악명 높은 사채업자였다.
“하아니! 이보쇼! 아무리 내 인감을 갖다줘도 그렇지! 오천만원씩이나 돈을 빌려주면서 그래 인감 주인인 나한테 확인 전화 한번 안했단 말요? 이래두 되는거요?”
“...”
“말해보쇼, 이래두 되는거욧! 당신은 순 사기꾼이얏!”
“뭐...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습니다. 사기꾼이란 말은 당치도 않아욧!”
채권자의 입에서 살얼음 같은 목소리가 똑똑 수화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가다는 단호한 어조로 소리쳤다.
“나 난 절대로 이 돈을 갚을 이유가 없소 절대로. 하늘이 두쪽 나도 못 갚아!”
“그야...법에서 알아서 하겠죠 뭐.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것쯤 모를리 없을텐데요?”
“버업? 무슨 놈의 법! 인감도장 준 일두 없구, 인감증명 떼준 일두 없구, 돈 주고 받는거조차 까맣게 모르는데도 법이 나보고 오천만원 당신 주라고 한단말요?”
“글세 법에서 알아서 할껍네다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김가다는 수화기를 부서져라 탕 하고 내려놓고 말았다.
이튿날 김가다는 읍사무소로 헐레벌떡 뛰어들어갔다. 기세로 봐서는 읍사무소를 온통 두들겨 부숴버릴 것 같았다. 김가다가 다짜고짜 여직원의 얼굴에다 대고 벼락 때리듯 고함을 내 질렀다. 볼 일을 보러 온 사람들의 시선이 김가다의 얼굴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아아니, 본인도 아닌 사람한테 남의 인감증명 마구 떼 주는거얏? 그래서 머리가 허옇게 부서질 이 나이에 남의 재산 들머리판 나게 만들엇? 엉?”
깜짝 놀란 여직원이 눈을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뜨고 김가다를 쳐다보았다.
“빨리 말해봐! 이래도 되는거냐곳!”
그때 나이가 꽤 듬쑥해보이는 남자직원 하나가 김가다 앞에 다가와 사연을 물었다. 용고뚜리인듯 얼굴이 담배연기에 누렇게 찌든 얼굴이었다. 김가다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되어진 일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남자직원이 억지로 침착을 가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원래 인감위임장 제도가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못오는 분들을 위해서요.”
“뭐요? 아니 그럼 언놈이 남의 인감도장 훔쳐다가 인감증명 마구 위임 받아갖구 죄 써먹어도 괜찮다는 노가리네? 그건!”
“노가리라뇨?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하아니, 당신 말대로라면 내 말이 맞잖앗!”
하지만 그 남자직원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채로 고압적인 말투로 말했다.
“어쨌든 우린 원칙대로 한 겁니다. 그 법을 만들어 낸 사람들한테 가서 따지시든지.”
“...!”
아무래도 승산 없는 싸움만 될 것 같아서 김가다는 읍사무소를 헉헉대며 빠져나왔다.
그날로부터 김가다는 풀방구리 생쥐 드나들 듯 관공서 문턱을 들락거려야 했다. 배울만큼 배웠다고는 하지만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양주땅 회암리 산골로 기어들어가 돼지똥, 개똥에 파묻혀 살았던 세월이라 사회경험이 있을리 만무였다. 어느날엔가 김가다는 군청에 들러 산업계장이란 팻말 앞에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읖조리고 앉았다. 그리고 토지 용도변경을 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을 자세히 늘어놓자 쇼파에 젖버듬히 누운듯 기대앉은 그가 로보캅처럼 목을 빳빳히 세우고 우질부질 거만을 떨며 말했다.
“도시과 애들하고 잘 얘기해보셔. 내가 뭐 그런 일까지 시시콜콜하게 스리...”
졸지에 재산이 공중분해되고 처자식 이끌고 알거지로 행길에 나서야 할 판인지라 김가다는 정신없이 이곳저곳 관청을 뛰어다니며 법정투쟁에 나서야 했다. 어느날 여우머리를 꼭 빼어닮았던 그 사채업자는 법원 복도에서 김가다와 딱 맞딱드리자 마자 갈고리눈을 쫙 치켜뜨며 비아냥대듯 이죽거렸었다.
“보쇼, 쓸데없는 짓 말어. 어차피 판검사도 다 돈있는 사람 손들어 주게 되있어.”
그 순간 김가다의 영혼은 마치 백열등 속의 진공 상태에 탁 갇혀버린듯한 암울한 느낌이었다. 김가다 부부는 일원 한장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엉뚱한 놈이 다 끌어다 써 버리고 줄행랑을 쳐버렸는데도 경찰은 김가다 부부의 말은 믿지 않고 되레 김가다 부부를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거짓말 탐지기에 앉히기도 했었다. 거짓말 탐지기 판독결과가 나온날 김가다 부부가 담당 수사관과 어느 다방의 구석자리에 마주 앉았을 때였다.
“뭐 술잔거리로 돈백만 주면 판독결과를 유리하게 고쳐주겠소.”
“...!”
그때 김가다 부부는 형편이 수무푼전이기도 했지만 망하면 망했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시르죽히 자리를 떠 버렸었다. 길고도 지루했던 3년여의 법정투쟁을 벌이는 동안 김가다네 가세는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져 버렸으나 일단 1심 재판에서는 승리했다. 하지만 사채업자는 곧 고등법원에 항소장을 들이밀고 말았다. 또다시 군청과 경찰서, 법원 등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김가다는 비로소 이를 악물었다.
“공무원이란 이토록 소사스럽고 너더분하기 짝이 없구나...”
언젠가 사건결과가 너무도 궁금했던 나머지 법원의 담당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조심스레 물어 보았을 때 그 여직원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 한마디에 김가다는 가슴이 하얗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상대방의 항소심에서도 김가다의 5천만원 건은 승소했으나 그 사채업자의 말대로 아내의 2천만원 건은 패소하고 말았다. 훗날에 우연히 그 사건을 맡은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을 교회 집사님을 통해 어찌어찌 알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몹시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사건은 이길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 그 여자가 꽤 큰 돈 보따리를 들고오는 바람에...”
그 이후로 김가다는 판검사든 경찰관이든 군청직원이든 하여튼 관청에만 들어서면 가슴이 퉁탕거리는 긴장감으로 공무원 알레르기가 발동했다.
“어디 조금만 삐딱하거나 불친절하기만 해 봐라 그냥...”
그렇게 어금니를 질근질근 씹으며 공연히 관청문턱을 씩씩거리며 들어서는 못된 습관이 생겨버렸다.
“나도 이젠 무관의 제왕이 되었어. 그대로 보아넘기지 않을테야...”
하지만 그 머리털이 홀랑 빠져버릴듯 괴롭고 고통스럽던 사건은 15년전 일이었다. 요즘도 김가다는 법원에 모처럼 들릴 일이라도 있으면 그때 수화기를 놓기 직전 지렁이처럼 내뱉았던 그 여직원의 목소리가 영혼의 심장을 때리는듯 해 온 몸에 와삭와삭 소름이 돋는다.
“씨발, 촌놈의 새끼가...무식해 빠져갖고...”
그때 그 법원 여직원이 아직도 어느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15년전의 일이고 소설이 아닌 사실인 바에야, 김가다에게는 그저 하고 많은 세월 빈 하늘만 쳐다보고 하품만 뻑뻑 내뱉아온 절치부심의 세월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