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행동하는 양심 창립기념 강연
(2014. 2. 25, 화, 19:30, 김대중도서관)
오늘 왜 김대중을 다시 얘기해야 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본 김대중’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사실 여기서 내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까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하셨는데, 영원한 비서실장은 권노갑 한 분입니다. 나는 공식적으로 비서실 차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때는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습니다. 여기 역전노장들인 이해동 목사님뿐만 아니라 최경환 실장님, 김태흠 이사님도 아마 김대중학에 관한 한 권위자일 것입니다. 이 분들 앞에서 제가 뭘 안다고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겠습니까. 다만 우물안 개구리가 보았던 김대중 선생님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김대중 선생입니다. 우리가 김영삼 대통령을 김영삼 선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위상을 갖고 많이 노력한 김종필씨는 유능한 정치가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김종필 선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선생님이란 이름을 붙여서 통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박사라면 모를까 우리가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왜 선생일까? 왜 선생님으로 불러도 그냥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을까? 측근들이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서 선생님이 됐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스승입니다. 스승이란 말을 쉽게 붙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에 스승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분에서 네분입니다.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33살 꽃 같은 나이에 전 인류를 대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不踰矩(불유구)의 경지인 공자, 이 정도만 되도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梵網經(범망경)이란 불경을 보면 사람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劫(겁)이라는 시간 단위가 있는데 한 겁이 되려면 사방이 40리나 되는 둘레의 큰 원통에 성경과 불경에서 다 작다는 표현을 쓰는 겨자씨를 잔뜩 담아서 1년에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다 없어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 겁이란 시간단위가 500겁이 되어야 현세에서 소매 깃을 스치는 인연으로 만난다고 합니다.
김광섭의 ‘저녁에’란 시가 있습니다. 그 시 마지막 구절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김환기 화백은 점 하나하나로 전체를 구성하는 작품의 제목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붙였습니다. 그 작품을 보신 분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인호씨의 작품 ‘인연’에서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사람 간 만남의 신비함을 설명합니다.
한 민족 한겨레로 만나려면 4천겁의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될 인연이 7천겁이고, 부모자식의 인연이 8천겁이고 스승과 제자로 만나는 인연이 만겁이라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가 같은 시대에 본 것만 해도 엄청난 인연인데 만겁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측근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었다고 내가 감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처음 뵌 이후 오늘 이 순간까지 김대중 대통령은 내게 선생님입니다.
내일모레면 내 나이 70이고 5선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 모든 상임위와 본회의에 100% 참석합니다. 왜 그런 기록을 갖게 되었는가? 간단합니다. 늘 김대중 대통령이 옆에 따라 다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괜히 시켜주냐? 너 국회의원 할 때 별짓 다한다고 하고 국회의원 됐지 않았냐? 그런데 왜 회의에 안 나가냐? 상임위원회는 기본이야. 학교에서 개근상 타는 이치와 똑같이 기본을 해 놓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그 다음이야. 그것도 안 하면 말이 안 되는 거야.” 그 분이 총재였을 때 원내총무의 의원출결 사항을 전부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공천에 반영했습니다. 철저히 했습니다. 내가 게을러져서 새벽 회의에 나가기 싫을 때도 벼락같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틀림없는 스승입니다.
며칠 전 기자들과 식사 중에 한 기자가 내게 “왜 노인네가 자꾸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했을 때 난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 때문이야.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에 안 나오면 국회의원이 아니라고 했어. 회의가 개의되면 일단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얘기했어. 난 그 말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냥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야.”
또 김대중 대통령이 왜 선생님인가? 나이가 많아 선생님이 아니라 모든 일을 개척자로서, 파이오니어로서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선생님이 대변인 직을 하셨을 때 대변인답게 한 첫 번째였습니다. 기억에도 생생합니다. 당시 말씀하셨던 것을 지금 봐도 역사와 정치철학의 혜안이 담겨져 있는 그런 논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대변인이란 이름이 아닌 선전부장이란 이름으로 하셨습니다. 국회의원이 아닐 때였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의 모든 기록들도 그렇거니와 재경위원으로서, 정책의장으로서, 총재로서 첫 번째 길을 갔습니다.
우리 큰 애가 고대 법대에 가던 날 갖다 주라고 글을 써 주셨습니다. 서산대사의 시였습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이 시는 백범 김구선생이 즐겨 쓰시던 것이기도 합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들길의 눈을 밟으며 갈 때에도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그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내가 오늘 간 길의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나중에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항상 모범이 되겠다고 생각하신 분이 아니면 그런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선생이라는 말이 그냥 불러서가 아니라 스스로 첫 번째가 됐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역사에 없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첫 번째 대통령이 됐던 것입니다. 역사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첫 대통령이 됐다고 난 생각합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직전대통령이 되시고 직전대통령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전범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 하신 분이 난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노무현 정부 첫 비서실장을 맡았는데, 어디선가 김대중 대통령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노무현 대통령이 평생을 통해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면서 가장 무서워했던 지도자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고, 김대중 대통령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했어요. “문 실장, 대통령 잘못 모시는 거야. 현직 대통령이 어떻게 전직 대통령의 집을 찾아올 수가 있는가? 내가 가야돼. 내가 낫는 대로 연락할 테니 자리를 마련하게.”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노무현 대통령께 전해드렸더니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그리고 한 열흘 뒤에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로 오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한테 문안을 받으러 가시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결국 쓰러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혔고 신문에도 안 났지만 참으로 어렵고 당황되는 그런 순간이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직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전범을 만들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보여주셨고 두 번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등 그 모습들을 곁에서 보면서 저 양반은 선생님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게 먼저, 先(선), 파이오니아, 선구자적 길을 가서 항상 전범이 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 역할을 함으로써 그 역할을 해냈다는 것으로 기록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말, 어록 중에 지금 내가 그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여기 삼남이 계십니다만 어머님은 내가 그 말에 감격한다고 몇 번 고백했을 때, “그건 이제 너무 지겨워요”라고 말씀하신 말입니다.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는 세상,’ 그분이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자 했다고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생각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통일의 꿈이 무지개처럼 쏟아 오르는 세상.’ 이렇게 셋으로 요약을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가장 이상적인 가치 두 가지를 논하라고 하면 하나는 자유, 하나는 평등일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는 한 축이고 모르긴 몰라도 세계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한축은 평등을 이상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만 더군다나 아주 웃기는 세상이 됐습니다만, 3대 세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평등일 것입니다. 함께 골고루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을 낳았지만 그 이상은 이상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자유, 정의, 평화는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평화라는, 그래서 우리가 노래 부를 때 ‘자유, 평등, 평화~’라고 부르는, 인류가 생각하는 이상 세 가지를 김대중 대통령은 아마 이런 식으로 정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는 세상’은 자유가 최대한 실현된 세상, 그런 세상을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성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바로 그런 세상은 골고루 잘사는 세상, 함께 잘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바랐고 그런 식으로 문자화해서 정형화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활화산처럼 지금도 계속 불붙고 있는 것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입니다. 아직도 이 꿈과 이 이상과 이 가치는 아직도 변함없이 우리들의 가치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김대중 선생께서 즐겨 쓰시던 어록 중에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분의 여러 저서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최초의 발언은 초선 때 대성빌딩에서 흥사단이 개최한 금요강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처럼 정반합으로 패러독스를 승화시키는 제3차원적 언어질서입니다. 명분과 실리, 이상과 현실, 총론과 각론, 평화와 안보의 패러독스를 합치는 것입니다.
햇볕정책의 뼈대도 바로 평화와 안보라는 두 패러독스를 합치는데서 출발했습니다. 햇볕정책의 기본원칙은 한쪽은 평화, 한쪽은 안보, 하나는 싸우자, 하나는 싸우지 말자, 이 둘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안보태세의 확립’이라는 안보와 ‘흡수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평화와 ‘점진적 교류협력에 의한 통일,’ 이렇게 3단계로 벌어지는 사고는 내가 생각하기에 헤겔의 정반합의 기본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내가 여쭤보지도 않았고, 답도 얻지 못했지만 그분의 사상 구조를 이루는 뼈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남 이승만의 실리와 현실감각,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얘기했던 현실적 권력개념만 갖고는 정치가의 유형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셨습니다. 그보다 한 수 위인 백범 김구 같은 우국지사적, 서생적, 선비적 역사의식과 시대정신, 이것을 추구하는 어느 사상가적 측면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면서 현실의 김대중 선생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평생 동안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에 관해 고민하셨고 그것에 대한 해답도 얻으셨고 대통령이 되셔서 결국 실천하셨습니다.
처음엔 IMF 극복에서 출발하셨는데 IMF 극복 그 자체를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쌍두마차를 조화롭게 하는 그런 사고에서 하셨습니다.
서생적 문제의식, 바로 그 대목이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서생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냥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서생적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서생이면 선비인데 문제의식만 갖지 말고 행동을 해야 행동하는 양심이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바로 ‘행동하는 양심’에서 김대중적 고민을 느낍니다. 김대중 선생께서는 서생적 문제의식을 갖고 고뇌하는 속에서 이런 경우에는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봅니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인용했던 글을 여기서 한번 인용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 앞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내 말이 아니라 마틴 니묄러 목사의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라는 고백 시입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조합을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 시 뒤에 ‘고로 나는 죽었다.’ ‘고로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다’는 표현에 도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란 표현이 나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에게 아주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프라그마틱한 측면이 있지만 오늘의 주제와는 덜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철학에 實事求是(실사구시)정신이란 현실적 상인정신이 하나의 뼈대를 이루지만 여기서는 생략을 하고 마지막으로 강조할 것은 박근혜정부 출범 1년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박근혜정부 출범 1년을 보면서 참으로 기가 막히고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평화적 정권교체 때 죽기 살기로 했고, 그 다음에 다시 한 번, 지난 10년간 이뤄놓은 업적이 헛것이 돼서 얼토당토한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두려워서 죽기 살기로 또 했었습니다. 이제 또다시 민주개혁 정부 10년의 역사가 도루아미타불이 되는 현장을 보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그냥 있어야 되는 것인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적은 힘이지만 우리 마음들이 한데 묶여져서 김대중 대통령께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