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으로 임용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저…투표하러 투표소에 갔는데 저희 아버지 이름이 명부에 없어요. 어떻게 된 거죠?”
선거일 당일 다소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한 대학생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어왔다. 최근 전입신고 한 적도 없다고 했고 특별한 이유 없이 선거인명부에 이름이 없는 경우였다.
“아버지 옆에 계신가요? 죄송합니다만 아버지께서 혹시 집행유예 중이신지요.”
당시 공직선거법상으로는 집행유예기간 중인 자는 투표를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수화기 저편에서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가 그렇다는 표시를 한 모양이다. 이내 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물었고, 아버지는 실수에 의한 교통사고였다는 말을 체념한 듯 반복하였다. 아버지의 부끄러움과 상실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순간 마치 내가 투표를 못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는 이 같은 경우 꼭 본인과 직접 통화하여 사실을 확인하였고, 집행유예로 인하여 투표할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에 놀라게 되었다.
집행유예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의 형을 선고할 경우 그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 받는 판결인데, 최근 법원에서 발간한 사법연감 통계에 따르면 한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수가 대략 6만여 건에 이른다고 한다. 6만명이란 수는 지방의 그리 작지 않은 군 단위 인구수와 비슷하며, 작년 12월말 현재 경기도 연천군 전체 인구가 4만5천명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가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누적을 셈한다면 몇 개의 군이 될 일이다.
2007년 호주 대법원이 모든 수형자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규정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하였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수형자에게?’ 나는 반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감옥에 있는 자는 물론이고 감옥에 가지 않더라도 집행유예 중인 자들도 선거권이 없었으니 호주 대법원의 판결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지난 1월28일 우리 헌법재판소에서는 집행유예기간 중인 자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있는 공직선거법 및 형법 조항에 대하여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제야 이미 몇몇 나라에서는 일부 수형자들이 선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수형자가 아닌 집행유예 중인 자들에게는 다들 선거권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유를 보면 “집행유예자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외국의 입법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힌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외국에 비해 우리가 늦은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보통선거 원칙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각 투표의 가치가 동일해야 한다는 평등선거의 원칙이 의미가 있다. 또 그래야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그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의 구현을 주문한 것이 이번 결정의 핵심이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외국에 비해 늦은 만큼 단호하게 단순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가 법률조항에 대하여 단순위헌 결정을 내리면 즉시 그 조항은 법적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로써 올해 6월4일 치러지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공직선거법(동법 및 일부 관계법) 이외의 법 위반으로’ 집행유예기간 중인 사람들은 모두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과거 대학생 아들과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게 얻은 선거권인 만큼 그 권리를 소중히 행사하기를 바라며, 대한민국 건국 이래 집행유예 중인 사람이 투표하는 최초의 선거라는 점에서 이번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의미를 한 번 더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