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매년 10월이 되면 국군의 날과 한글날로 축제 분위기가 된다. 만약 이 기간 중에 추석 연휴라도 끼게 된다면 국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연휴를 만끽한다. 하지만 17일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국 현대사의 부끄러운 단면이 떠오른다. 이른바 ‘유신의 그늘’이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정부는 국회해산 및 정치활동과 일부 헌법의 효력을 중지했으며, 정지된 헌법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가 대신하기로 했다. 또한 평화통일 지향의 개정헌법을 1개월 내에 국민투표로 확정하고, 연말까지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는 선언이었다.
비상국무회의는 27일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한 달여 만인 11월2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정부가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지도계몽반을 편성해 적극적인 홍보전을 벌인 결과, 91.9%의 투표율과 91.5%라는 놀라운 찬성률을 가진 유신헌법(維新憲法)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전광석화와 같은 훌륭한? 군사작전이었다.
12월15일, 유신의 총아가 될 2,359명의 대의원들이 선출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었다. 유신의 절정은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이다. 같은 달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간접선거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당선시켰다. 박 대통령이 27일 정식 취임했고, 이른바 유신체제인 제4공화국이 공식 출범했다.
당시 정부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주장했지만, 민주주의 시계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다는 조항은 대의제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또한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삭제시켜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정면으로 훼손했다.
3권 분립이 무너지고 대통령이 절대권자로 등극하게 된 점은 유신체제의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온 주요 원인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견제의 유신체제는 멈출 수 없는 권력욕의 화신이 됐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자 부마항쟁을 이끌었고, 결국 절대권력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10.26사태를 초래했다. 유신의 시작은 유신 종말의 서곡이었다.
유신의 계절이 돌아왔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유신이 왜 시작됐고, 어떻게 진행됐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성찰해야 한다. 유신을 추종했던 세력도, 유신을 막지 못했던 세력도 모두의 책임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