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은 문화대혁명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마오가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인 극좌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58년 마오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났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2천만명 넘는 사망자를 낳은 대참극이었다. 마오는 사태 확산을 우려해 1959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다. 마오는 농업국가인 중국 현실을 무시하고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밀어붙이다 민생을 파탄에 빠지게 하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반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본주의 일부를 반영한 정책으로 민생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고, 마침 이 정책이 실효를 거두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국의 새로운 실세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자신의 권좌가 흔들리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순 없었다. 마오는 자신의 측근 4인방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실용파 제거를 위한 음모를 꾸몄다. 1965년 11월10일 4인방 중 한 명인 요문원은 일간지 <문회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를 발표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논문이었고,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해서파관(해서가 관에서 파면당하다)은 수도 베이징의 부시장인 오함이 1960년에 썼던 경극 각본의 제목인데 요문원의 논문은 이 각본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해서(海瑞)는 명나라 가정제 시대의 고관인데 황제가 민생을 돌보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가 투옥된 인물이다. 이 극본에 나온 해서의 대사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신은 너무 독단적입니다. 당신은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고 비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중략) 온 나라 사람들이 당신에게 불만을 품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마오는 이 대사가 자신을 비판한 펑더화이의 이야기이며, 그를 파면한 황제는 자신이고, 이는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는 구실로 실용파에 대한 정치투쟁을 벌였다.
마오는 곧바로 부르주아 세력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부르짖으며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의 의도대로 전국적으로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됐으며, 홍위병 광풍은 전국적으로 번져 마오 반대 세력들에 대한 테러가 시작됐다.
특히 류사오치는 홍위병의 최대 표적이 됐다. 그는 홍위병들에 의해 “주자파(친자본주의적 인물)의 우두머리”, “반혁명분자”로 비판 받았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나 이듬해 정부에서 실각당했고, 당에서도 제명돼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들어갔다. 홍위병의 온갖 수모를 겪던 그는 결국 지방으로 쫓겨나 당뇨병, 폐렴 등의 지병이 악화됐으나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1969년 11월12일 사망했다. 또한 인민해방군의 혁명 개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주덕 원수는 홍위병들에게 잔혹한 공격을 당했다.
1967년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내전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다시 권력을 되찾은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토사구팽시켰다. 1968년 마오는 “그대들은 나를 실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으로서 중국의 전사들을 실망시켰다”며 홍위병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중국 전역을 피비린내 나는 지옥으로 몰아세웠던 마오가 1976년 사망하자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마오 사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극좌적 오류’였다고 공식 평가했다.
20세기 중국 최대의 비극인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한 개인의 권력욕에서 시작됐다. 중국은 권력자의 과도한 권력욕이 온 국민을 비극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우리 정치인들도 이 교훈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