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수년 동안 질질 끌어오면서 옥정동 마을 사람들을 애태우던 토지 보상이 시작되었다. 조상 때부터 많은 농토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돈벼락을 맞은 셈이고 그나마 외지에서 들어와 어렵사리 땅을 장만해서 돼지나 소를 키우며 생계를 유지해오던 사람들도 그저 그런대로 보상금을 괜찮게 챙겨 저마다 살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모양이다.
옥정동 마을 일대가 몇 년 후면 아파트촌으로 완전히 탈바꿈해서 어디가 어딘지 구별을 할수 없을 것을 생각하니 김가다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섭섭하고 착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김가다가 1974년 4월에 처음 율정동 마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는 들녘이 온통 농사짓는 사람들로 개미처럼 부지런을 떨 때였다. 논바닥마다 모심기 준비로 장써레를 하느라 소들이 혀를 한자나 빼물고 힘들어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논두렁을 끼고 흐르는 보에서 족대로 물고기를 잡느라고 정신이 빠져 있었다.
서울 충무로 바닥에서 시작해서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스물여덟해를 수돗물만 먹고 살아온 김가다는 그때의 시골 풍경이 너무도 목가적이고 행복을 느낌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옥정동이나 율정동, 회암동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고 사람들은 아궁이에 군불을 때어 온돌방을 데워 겨울을 나는 집이 많았다. 지금처럼 기계로 모를 심고 벼를 베면서 곧바로 타작이 되는 시절이 아니었고 모심기 할 때는 온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품앗이로 모내기를 했었다. 김가다는 처음 그 동네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 결심한 것이 있었다.
“절대로 공부께나 한척 하지 말자. 알아도 모른척, 잘난 것이 있어도 잘난척 말고 나도 그냥 그들처럼 촌맹이 되어 저 사람들과 똑같이 봄에는 논바닥에 허리를 구푸리고 모도 심고 가을에는 지게로 볏단을 타작마당에 저나르고 탈곡기도 밟아야지.”
김가다는 정말 농촌청년들이 좋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의뭉스럽지 않고 털털대며 웃고 떠들며 탁배기 잔을 스스럼 없이 돌리는 그 소탈함이 너무도 좋아서 세월 가는줄을 모르고 그들과 어울려 살았다. 김가다가 옥정동 마을에 유별나게 애정이 많은 것은 아내의 고향집이 옥정동 마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옥정동 마을에는 아내의 일가친척들이 터줏대감으로 곳곳에 똬리를 틀고 눌러앉아 있었다. 김가다는 돼지막 청소를 끝내놓고 틈만나면 옥정동 마을에 마실을 갔다. 그 동네에 가면 어딜가나 공짜로 술을 퍼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상다리가 부러져라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모내기 철에나 타작철에 일꾼 한사람이 너무도 아쉬웠던 터에 김가다가 그런 일을 농촌사람들 못지않게 꽝꽝 잘해주었기 때문인듯도 했다.
옥정동 동네 앞을 흐르는 개천은 그 당시만해도 맑고 깨끗해서 동네 청년들이랑 어울려 밤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배터지게 끓여먹기도 했고 여름밤에는 복찻다리 아래에서 목욕하러 나온 여자들을 훔쳐보느라고 동네 청년들과 야간 포복을 하기도 했었다. 그때 처녀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 장면을 자세히 훔쳐보았는데 그 중 한 처녀는 덕정에 있는 ○○상회 아들에게 시집갔고 그 처녀들 중 하나가 지금 김가다의 아내가 되어있기도 하다. 옛 옥정동 마을에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전설처럼 김가다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김가다는 혼자 쿡 하고 웃음을 삼킬 때가 종종 있다.
덕정에서 송우리로 넘어가는 개천변에는 당시 술집이 다닥다닥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술집이 그냥 술만 파는 목로 술집이 아니라 논다니 아가씨들을 구해다 밤새 술상을 두드리며 노는 소위 니나노 술집이었다. 지금은 옥정동에 살고 있지 않지만 30년전 그 마을에 살던 박아무개가 어느날 장림에서 나무를 한짐 해 지고 내려오다가 목이 컬컬한 나머지 목로에서 깍두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한되 시켜놓고 김가다와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그 집에서 일하던 논다니 아가씨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안으로 들어와 마시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장가간 지 일년쯤 되어갈 때였다. 사실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 술집 아가씨가 김가다에겐 전혀 관심 없이 그 녀석만 안으로 불러들인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가다는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외상술을 줘도 외상값 받을 일이 막막했지만 그의 집은 농토가 많아서 가을추수가 끝나면 대청에 쌓인 쌀가마가 천정에 닿을 정도였다. 그 술집 주인이 그걸 알고 아가씨를 꼬드겨 녀석을 그날 밤 찍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훗날 그가 털어놓은 말에 의하면 그는 그만 개미귀신에게 홀린듯 그 집 방안에 끌려들어가 곤죽이 되도록 아가씨와 놀았는데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벽 4시가 가까워져 있었다고 했다. 그가 부랴부랴 밖으로 나와 나뭇짐을 지려고 하자 술집 주인이 호통을 치더란다.
“나뭇짐은 왜 건드려?”
“이 나뭇짐은 내 것인데 왜 그러슈?”
“아, 술값이 얼만데 그래?”
“술값이 얼마긴, 아 가을에 농사지으면 쌀 한가마 갖다주기로 했잖우?”
“홀딱쇼 구경값은 안줘? 술값은 술값이고 홀딱쇼는 홀딱쇼지!”
“그럼 술값만 쌀 한가마란 말요? 뭐가 그렇게 비싸?”
“잔소리 말고 있는거 다 털어놓구 가. 동네사람 알면 망신잉께.”
“뭘 털어놔. 산에서 나무 해 지고 온 사람 보고?”
“그러니까 나뭇짐 놔둬. 우리도 나무 사 때고 살잖여? 손목에 찬 시계도 풀어놓고 가라구.”
“...!”
결국 녀석은 나뭇짐은커녕 결혼예물로 받은 시계까지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엄동설한에 불도 못 때고 차가운 독수공방에서 밤새 오들오들 떨면서 이를 갈고 있던 그의 아내가 결국 새벽녘에야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들어온 남편을 족치자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은 남편의 얼굴을 얼마나 긁어댔던지 그의 얼굴이 콩타작 마당에 갈퀴자국 난듯 되어버렸었다.
하여튼 그 술집에서 여자들 홀딱쇼 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한 뒤로 옥정동 마을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어른들 몰래 쌀가마를 지게에다 지고 술집에 갖다 바친 총각들이 꽤 여럿 있었다. 심지어는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통째로 리어카에 싣고 갖다준 녀석도 있었다.
어쨌거나 수없이 많은 희로애락을 간직한 채 옥정동 마을은 이제 그 질퍽했던 인심의 강을 역사의 그늘 속으로 숨긴 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아련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며칠전 김가다는 5년여 동안 몸살을 앓아오면서 고통과 절망의 문을 수없이 두들기며 치열하게 고민해왔던 대하 장편소설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아직도 옥정동에 살고 있는 친구가 김가다에게 전화를 했다.
“자네가 살았었던 땅하고 집, 공장건물도 100평짜리지?”
“그건 왜...”
“그 땅이 이번에 보상비로 20억을 받았다네. 좀 억울한 생각 안들어?”
김가다는 수화기에 대고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 땅을 사기로 경매에 빼앗겼지만 여지껏 그 땅에 살았다면 내가 뭘 했겠어. 그냥 옛날 그 꼴로 허구헌 날 술이나 퍼마시며 허접쓰레기처럼 미랭시로 늙어가지 않았겠어?”
“그래도 돈이 20억인데...”
“이보게. 20억 아니라 200억이라도 아니 2천억이면 내가 10권짜리 장편소설과 바꾸겠나? 사명있는 사람은 그 사명을 결코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거야.”
“...”
김가다는 그 친구와 그렇게 전화를 끝내놓고 나서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발 속에 망연하게 눈길을 보냈다.
“참 좋은 사람들이 많은 동네였고 아름다운 일들도 많았던 옥정동 마을이었는데...마누라의 고향이 바로 나의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그 고향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이 아쉽다. 하지만 우리의 영원한 본향 영혼의 파라다이스가 있으니까...그 곳을 바라보며 남은 생을 열심히 살아야겠지...사명있는 자는 사명을 결코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는 감사와 긍지를 갖고 말이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