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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 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저자 |
중학교 때 교향곡을 처음으로 접하는 기회가 있었다. 미국의 신시내티 교향악단이 한국 방문 연주회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것이다. 당시 음악선생님께서 신시내티 교향악단에 대한 설명과 그들이 연주할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에 대해 자세히 사전교육을 해주셔서 더욱 의미 있는 연주회가 되었다.
그 유명한 2악장의 ‘고잉 홈’ 멜로디는 귀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후로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데 첫 번째 계기를 마련해준 잊지 못할 음악회였다. 이 음악은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고향 보헤미아를 그리워하다 향수병에 걸린 그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으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드보르자크는 1841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불타마(몰다우) 강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관 겸 푸줏간을 운영했고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하였다. 드보르자크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시절에 바이올린을 배웠고 재능이 뛰어나 종종 여관 손님들 앞에서 연주를 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의 바이올린 솜씨를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고 자신의 뒤를 이어 푸줏간과 여관을 이어받아 그냥 안정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푸줏간을 운영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드보르자크를 외삼촌이 있는 소도시로 보내 독일어를 배우고 푸줏간 자격증을 따는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푸줏간 면허를 따기 위한 교육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다. 다행히 독일어 선생님이 그의 음악 재질을 알아보고 음악도 함께 가르쳐 주었다. 이곳에서 그는 바이올린, 비올라, 건반 악기 연주법과 화성학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드보르자크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푸줏간 면허를 따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음악사에서 유일하게 푸줏간 면허증을 가진 음악가로 기록되게 되었다. 푸줏간 일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았고 아버지 일도 물려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강력히 푸줏간 일을 이어받도록 강권하였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외삼촌과 리만 음악선생이 아버지를 끈질기게 설득하였고 그의 모든 학비를 외삼촌이 대는 조건으로 겨우 승낙을 받았다.
드보르자크는 16세에 드디어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르간 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호텔이나 레스토랑 같은 곳을 전전하며 비올라 연주자로 일했지만 악단에서 받는 박봉으로는 오선지를 사기에도 부족할 만큼 매우 어려운 생계를 꾸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의 음악적 재질은 크게 향상되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 그는 유명한 음악가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 초연 때 비올라를 연주하며 선배 작곡가의 선구적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었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연주가 되지도 않을 것이 뻔했지만 여러 편의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귀금속 상인의 딸이면서 배우였던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시골뜨기 남자의 첫사랑이었는데 그녀가 귀족에게 시집을 가버리는 바람에 실연을 당했고 첫 사랑의 상처는 매우 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몇 년 후 자신의 콘서트에 합창단원으로 알토를 담당했던 첫 사랑 그녀의 동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 그의 앞길은 환하게 열렸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5년간 장학금을 받게 되어 생활 걱정을 않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고 유명한 ‘슬라브 무곡’을 작곡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장학생 선발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가 드보르자크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생면부지의 외국 작곡가인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으며 두 사람은 평생 끈끈한 우정의 교류를 갖게 되었다.
잘 나가던 그에게 어느 날 미국 뉴욕으로부터 전보 한 통이 날라왔다. 전보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선생님을 뉴욕 국립음악원의 원장으로 초청합니다.” 그를 초청한 이는 재닛 더버라는 여성으로 미국 음악의 진흥을 위해 뉴욕에 새로운 음악원을 설립하였는데 원장직을 맡을 인물을 고르던 중 드보르자크의 명성을 듣고 초청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드보르자크는 갈등하였다.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고 몇날 며칠을 배로 가는 먼 이국땅으로 고향을 등지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버 여사가 제시한 대우 조건이 워낙 파격적으로 높은데다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배려해준 덕분에 그는 그녀의 초청을 수락하였다. 그가 도착한 신세계는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과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압도되었고 흑인과 인디언들의 피눈물이 우러나는 이들의 음악에서 그는 큰 충격과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작곡된 곳이 그 유명한 ‘신세계에서’ 교향곡과 현악사중주 ‘아메리카’, 첼로협주곡 ‘B단조’ 등이었다. 신세계를 향한 그의 도전 속에 태어난 걸작들인 것이다. 새해 첫 날에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에서’를 또 듣는다.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준 것은 웃음이었다. 2006년 1월1일부터 웃기 시작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신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혼자서 오솔길을 걸으며 웃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수백명 수천명이 함께 걸으며 웃고 있는 것이다. 같이 걷는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나처럼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도 웃음의 신세계를 널리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금년도에도 나의 신세계 교향곡 웃음을 널리 전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