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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과 역관, ‘미녀들의 수다’
고승우/미디어오늘 논설실장
  2008-02-18 15:00:40 입력

▲ 고승우/미디어오늘 논설실장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가 ‘영어교육’으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다. 영어를 잘 해야 잘 살 수 있는데, 우리가 영어를 너무 못한다는 것이다. 정권 인수를 한참 고민해야 할 판에 난데없이 영어교육을 소리 높이 외치고 있으니 어리둥절해진다. 영어가 중요하긴 하지만 아직 정식 취임도 하기 전인 당선인이 불도저 같은 속성을 여러 모로 드러내고 있다.

당선인 쪽은 새로운 영어교육 방식을 도입하겠다면서 반대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인수위 쪽에서는 공청회에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예 초청 대상에서 빼버렸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마디 할 영어교육이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묘안도 아닌데 국민을 대하는 모습이 정도에서 벗어나 있다.

과연 우리는 대통령 당선인까지 나서서 강변할 만큼 외국어 회화에 무능한 그런 민족인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외국어 회화 자질이 매우 우수하다는 것은 역사에 잘 나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주변 민족이나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일찍부터 중국어, 일본어, 여진족어, 몽고어 등에 능통한 전문가를 국가적으로 양성해서 대처했다. 이른바 역관으로 알려져 있는 외국어 전문가들인데 오늘날 ‘동시통역사’로 볼 수 있다.

조상들은 ‘찍찍이’와 같은 정교한 어학기가 개발되지 않은 시대에 살았지만 오늘날에도 손색이 없는 외국어 학습서를 개발해 사용했다. 그 학습서들이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온다. 동시에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해서 현지 외국어를 익히도록 했다. 역관들은 3국 시대 이래 복잡하게 전개된 한반도 주변 상황에서 외교관이나 무역인 등의 역할을 해냈다. 우리 선조들의 외국어 학습방법이 수준급이었던 것에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그러나 대부분 중인 출신이 많았던 역관들은 중국 외교사절과의 교섭 과정에서 아주 전문적인 용어가 나오면 통역을 잘 못해 비웃음을 샀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이는 시대를 불문하고 ‘동시통역사’ 누구나 겪게 되는 불가피한 경우로 보인다. 어느 누구도 모든 분야에 전문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쪽은 전 국민을 역관으로 만들겠다는 발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역사 속에 나타난 역관들이 보인 한계, 즉 특정 전문분야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영어만으로 교육시킨다 해서 영어회화 속에 담기는 내용에 대한 전문성이 절로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모국어를 통한 깊이 있는 전문성을 연마해야 한다.

당선인 쪽에서는 우리가 영어회화를 너무 못한다고 강변하는데 이는 좀 지나친 듯하다. 영어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서 영어를 잘 하면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영어를 해야 할 처지가 아니라 몇 년에 한 번 정도 외국인이 길을 묻는 일을 당하는 경우라면 영어를 잘 못한다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외국어를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우리의 영어 실력을 걱정하는 사람은 요즘 우리 지상파 TV에서 방영되는 ‘미녀들의 수다’를 눈여겨 볼 일이다. ‘외국 미녀들’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면 ‘일상적으로 외국어를 사용하면 능숙해진다’는 상식을 일깨워준다. ‘외국 미녀들’처럼 한국에서 한국어로 살게 되면 한국어로 수다를 떨게 될 만큼 익숙해지는 법이다. 자국어나 외국어 등의 언어를 익히는 선천적 능력은 현존하는 종족들에게 보편적이다. 언어는 생존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원초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이 뒤처진 종족은 오래전에 도태되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우리 학생들이 생활영어를 잘 못하는 이유를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적고, 대학입시에 필요한 영어가 생활영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시교육으로 나날을 지세는 학생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교육시스템 탓이라 한다.

이 당선자나 인수위 쪽 인사들은 ‘영어회화 실패 경험담’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어교육 필요성을 강조한다. 거기에는 영어를 능숙하게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이 깔려 있다. 자기가 경험한 실패를 자라나는 세대가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능숙한 ‘동시통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이 들기 전부터 모국어 대신 외국어를 익히는 폐해는 새삼스레 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일제하에서 일본어를 강요받았던 당시를 상상하면 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영어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보다 영어가 더 유익하고 폼 나게 보인다는 잘못된 생각을 무의식 속에 심어주는 역효과가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슴속에 대못질하는 것이다. 외국어 교육이 필요하다 해서 민족의 정체성까지 뒤흔드는 식이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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