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은 을사 5적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1870년(고종 7년)에 출생했다. 특이한 점은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다. 즉 왕족의 신분으로 매국에 앞장선 후안무치한 인물이다.
이지용은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규장각 대교 등 요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1904년 외부대신 서리 신분으로 한일의정서에 조인했다. 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해 체결한 협약이다.
일본은 의정서를 근거로 조선에서의 자유로운 군사 작전을 보장받았고, 통신기관을 군용으로 접수하고, 경부·경의선 철도부설권도 일본군용으로 접수했다. 이 밖에도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의 서해안 어업권을 확보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된 근거가 된 협약이 바로 한일의정서다.
한일의정서에 조인한 이지용이 매국노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역시 을사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1905년 내부대신 때 을사조약에 찬성해 조인에 서명했고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5적이 됐다. 일본은 그에게 매국의 대가를 융숭히 베풀었다. 대한식산장려회 총재, 동아개진교육회 찬성장을 거쳐 국운이 다할 무렵인 1907년 중추원 의장의 자리에 올랐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중추원 고문이 됐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백작 칭호를 하사했다. 하지만 일제는 그를 1912년 도박죄로 태형을 선고하고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했고, 1928년 사망했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