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다의 교회에서는 한달에 한 두번씩 찬양선교단을 이끌고 군부대를 방문한다. 그날도 주일예배를 마친 뒤 곧바로 최전방의 적막강산 중턱에 누에처럼 엎드려 있는 ○○부대를 방문했다. 그 부대도 민간인 구경을 하기 힘들만큼 외로운 부대처럼 보였다.
“야! 꼭 내가 3년동안 근무했었던 부대와 꼭 닮았군. 저 산 밑에 행상독처럼 웅크리고 있는 탄약고와 개울가에 섰는 식당과 PX하며 하얀 페인트칠을 한 내무반 건물 등등...”
순간 김가다는 뇌리 속을 주마등처럼 달려가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기억의 카드 한장을 끄집어 내고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군대이야기는 풀어놓아도 풀어놓아도 판도라의 상자처럼 끝이 없을 것이다.
허구헌 날 호리건곤 술에 젖어사는 고영일이라는 이름의 전우가 있었다. 그는 전라도 고흥이 고향이었는데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다가 입대했다. 그에게는 결혼한 아내에게서 위문편지가 쉴새 없이 날아들었는데 여자친구가 한명도 없었던 김가다로서는 고영일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저 하늘에 보석가루를 뿌려놓은듯 반짝이는 별빛은 당신의 정열적인 눈빛처럼이나 아름답고...찬란한 영혼의 밀어를 속삭이는듯...”
그는 부대에서 일종계를 맡고 있었는데 김가다와 행정반에서 함께 근무했던 탓에 특식이 나올 때나 배가 고플 때마다 그의 일종창고로 스며들어가 많은 신세를 지긴 했다. 그가 사단 병참부에서 일종 수령을 다녀올 때면 참새가 방앗간에 들리듯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 꼭 한군데 있었는데 바로 다목리 산기슭에 홀로 서있는 충주댁이었다. 언젠가 김가다는 그와 함께 일종을 수령하고 오다 그가 이끄는 대로 그 충주댁에 들렸었는데 충주댁은 고영일이 나타나자 밥을 먹다말고 손바닥이 깨져라 손뼉을 치며 그를 반겼다.
“아이고! 고서방일세. 퍼뜩 방으로 들어오그라.”
그리고 곧이어 충주댁은 펌푸가에서 부엌으로 불풍나게 들락거리더니 곧 상다리가 부러져라 술상을 차려들고 두 사람 앞에 퍼지고 앉았다. 그녀가 안에다 대고 고함을 쳤다.
“점숙아, 고서방 왔다아. 빨리 화장하고 나와라아!”
오래지 않아 점숙이가 짙게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고영일은 그녀가 나타나자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진듯 그녀가 딸어주는 탁배기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점숙이가 안주를 집어 녀석의 입에 넣어주며 상체를 바짝 녀석에게 기대고 있었다. 여자들은 함께 따라온 김가다는 아예 관심 밖이었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참 더러워서 진짜. 난 뭐 쌍방울도 안 달고 다니는줄 아는거야 뭐야 진짜루...”
그렇게 속으로는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어쨌거나 술값을 내는 건 고영일이었기에 잠자코 주전자만 기울였다. 그리고 술 주전자가 꽤 여러번 바닥을 비운 뒤에 녀석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어디가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술값 걱정은 말고 실컷 마셔.”
녀석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점숙이가 충주댁과 눈길을 마주치고 나더니 그녀도 슬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충주댁은 모른척 김가다의 술잔에 술을 부으면서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화장실에 간다던 녀석은 술 한되가 바닥이 날 때쯤에야 나타났고 점숙이도 그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김가다가 쑥맥이 아닌 이상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었지만 내심 불쾌해진 심기를 억지로 눌러놓고 시침 뚝 떼고 말했다.
“무슨 화장실엘 그렇게 오래 있었냐? 그만 가자. 인사계한테 쪼인트 깨지기 전에.”
두 사람이 충주댁을 나섰을 때 쫄따구 운전병은 기다리다 못해 운전대에다 얼굴을 쳐박고 잠들어 있었다. 고영일이 부식수령차에서 통닭 몇마리와 동태 한박스, 그리고 쌀 한자루도 충주댁 토마루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충주댁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부대로 돌아오면서 김가다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얌마, 그 따위로 하니까 병들에게 정량급식이 안되지.”
“야, 군대 다 이런거지 뭐. 어차피 대대장, 중대장, 인사계, 선임하사, 고참들 다 떼먹고 사는 판인 게 군대야. 새삼스럽게 굴지마.”
“...!”
제대 한달쯤 남겨둔 어느 날이었다. 위병소에서 행정반으로 전갈이 왔다. 왠 여자가 면회를 왔는데 고영일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야, 고병장. 왠 여자가 찾아왔다는데? 혹시 네 마누라 아냐?”
“뭐 여자? 찾아올 여자가 없는데?”
김가다도 그것이 못내 궁금하여 고영일을 따라 위병소에 나가보았다. 여자는 충주댁 점숙이었다. 술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간을 빼어먹을듯 간들어진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 뭔 일로 찾아왔능강? 나 이제 제대해. 그래서 충주댁에 못갈 입장인디.”
점숙이가 등에 업은 어린애기를 돌려안으며 쌍클해진 눈길로 쏘아붙였다.
“애기는 우쨀낀데예? 그냥 제대해 뿌면 애기는 우째냐 이 말이요.”
“...!!”
“알아서 하소. 내 보안대 헌병대에다 칵 쑤시불끼요. 제대하면 결혼해주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해놓고 내도 몰래 도망칠라꼬? 내 그래 호락호락한 여잔줄 알았능교?”
위병소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전해들은 중대장이 위병소에 전화를 한 모양인듯 위병이 화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병장님, 중대장님이 저 여잘 데리고 행정반에 들어오랍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난 중대장이 어데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얼마 후에 사단 헌병대장이 연병장에 백차를 세워놓고 부리나케 행정반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중대장과 ROTC 동기였다. 그녀가 돌계집이라는 소문을 들어서 충주댁 내력을 훤히 알고 있는 헌병대장이 점숙이를 향해 호통을 쳤다.
“아줌마, 또 그 수법 써먹어? 벌써 몇 번째야 애 낳은게? 이번에야 말로 경찰서에 넘겨 콩밥 먹여 버릴테야?”
“...!!”
점숙이는 혼비백산해서 행정반을 뛰쳐나가더니 위병소 쪽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달렸다. 헌병대장이 고영일의 뺨따귀를 불이 번쩍 나도록 올려부치며 일갈했다.
“뭘 갖다주구 저년이랑 오입했냐! 자세하게 말해 새끼야! 영창 보내기 전에.”
“특식 나올 때마다 통닭이랑 쇠고기 돼지고기 육포도 갖다주구 두부랑 도루묵 상자랑 동태상자랑...그리고 쌀가마도...”
중대장이 은근슬쩍 헌병대장을 잘 구슬러서 고영일은 무사히 제대했지만 김가다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순간이 아찔했다. 모름지기 그날 함께 앉아 술타령을 벌였던 김가다 자신도 이헌령 비헌령이라고 결코 무사하지만은 않을 뻔 했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김가다에게도 고영일 뺨칠만큼 여자를 가까이 할 기회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때마다 사생아가 하나씩 세상에 태어났을 테지만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이 피하게 해주셨지 진짜루...그래 너무 감사하지 진짜...그래서 마누라에게 쫓겨나지 않고 지금껏 목숨 부지허구 살구 있잖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