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김가다가 살던 마을에 장정구란 사람이 있었다. 출생이 불행하여 나이 15세에 조실부모하고 읍내에서 천석꾼으로 떵떵거리고 사는 강첨지네 집에 처음에는 꼴머슴으로 들어가 살았다.
나이 들어 가면서 장정구는 성격이 거벽스러울만큼 우직하고 말 수가 적어 속내를 쉽게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힘은 장사라서 머슴치고는 첫 손가락으로 쳐주는 인물이었다. 겨울에는 20리가 넘는 먼 산에 가서 소바리로 하루에도 두번씩이나 나무를 실어 날라서 강첨지네 넓은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해토머리부터 모내기 철이 오면 그 많은 논에 장써래질은 도맡아 했을뿐 아니라 모를 꽂아도 여늬사람 세배는 빨리 꽂았다.
추수할때도 달구지에 집채만큼 벼를 싣고도 자신의 지게에 벼를 잔뜩 쌓아 지고 논에서 강첨지네 마당에 이르는 고개턱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달머슴을 부리기도 쉽지 않았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장정구를 칭찬했고 그런 복덩어리 머슴을 부리게 된 강첨지가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강첨지도 그런 일등급 머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여간 신경쓰지 않았다.
“재물이 붙을 사람은 강첨지처럼 따로 있는 갑다. 저렇게 일 잘하는 머슴을 어데 가서 구해? 황소처럼 일을 잘하니 강첨지가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지.”
“그러게 말야. 힘이 장사일뿐 아니라 사람이 순진하고 거짓뿌렁도 할줄 몰라. 그나저나 장가를 들여줘야지 저게 뭐야. 나이 30이 다 되도록.”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던지 강첨지는 참한 색시감을 일로 절로 수소문하던 끝에 상계동에 숨겨 놓은 자신의 노리개 첩을 통해 식당에서 식모살이 하고 있는 그녀를 데려다 서둘러 머슴과 혼례를 치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살림을 내주면서 쓸만한 집도 한 채 지어주었고 논을 서마지기나 떼어주었다.
머슴으로 청춘을 다 보내느라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장정구는 남들에게 머슴출신이란 자신의 성분이 한스러워서 자신을 천대하는 동네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그저 죽자사자 일해서 땅을 많이 사서 부자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집 온 그의 아내도 못배운 한이 쌓인 것으로 말하면 남편과 똑같았던 터라 부부는 손톱이 닳도록 일했다. 남들은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돌반흙반인 비탈밭에 나가 돌을 골라내어 몇 년만에 옥토로 바꾸었고 쉬는 날도 없고 노는 날도 없이 그냥 개미처럼 일만 했다. 돈을 아끼느라고 그 흔한 자반고등어 한손 안 사먹고 짜개김치 하나로 떼우고 살았다. 동네사람들은 모두 장정구 부부를 향해 입을 딱 벌리고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정구 마누라 말 들어봤어? 일이 바빠서 뒷간에 갈 시간도 없대.”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무슨 시간이 남아서 자식들은 내리 다섯이나 낳았담! 그것도 아들만 줄줄이 낳았으니 복이 터졌지 뭐야.”
“아 그거야 다르지.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구들장 깨는 재미마저 없어서야 무슨 맛으로 살어. 여자들 입소문에 정구 마누라가 그건 또 억세게 밝힌대는구먼.”
“정구 마누라만 그래? 정구놈이 또 얼마나 물건이 말만한데? 그놈 총각 때 논바닥에 서서 오줌 갈기는거 못봤어? 마치 봇물대듯 쏟아졌잖어. 어휴 그놈이 변강쇠 뺨칠놈야!”
어쨌거나 부부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10여년만에 논이 삼십마지기에 밭을 2천평이나 더 샀다. 그 부부의 생각대로 동네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장정구가 머슴출신이라고 얕잡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추수 때가 되면 쌀가마니를 대청에 쌓을 곳이 모자라 안방, 건너방까지 쌓아놓을 정도였다. 더더구나 장정구는 쌀판 돈을 허뜨리지 않고 현금으로 꽁꽁 챙겨갖고 있다가 아무 때든지 돈이 급한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기에 사람들이 이제 장정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어느날부터 장정구의 아내가 같은 고향출신의 과수댁이 운영하는 술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술을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고 밤마다 그 집 사랑방에 모여서 사람들과 어울려 화투치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밤마다 그 자리에 놀러오는 사람 중에 의정부에서 오는 별명이 백구두란 남자가 있었다. 장정구의 아내는 어느 순간 그 남자와 눈이 딱 맞아 버렸다. 그리고는 하루가 멀다하고 그 과수댁 사랑방에서 그 백구두에게 전축을 쾅쾅 틀어놓고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동네사람들은 장정구의 아내가 뜬금없이 화장을 짙게 하고 다니는 짓둥이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아연했다.
“정구 마누라가 화장을 다하구 다니네?”
“글쎄 말이야. 하기사 이젠 살만해졌으니 젊은 여자가 화장을 하고 다닌다고 뭐 흠될 건 없잖아.”그런 말들이 슬금슬금 불거지기 시작하던 어느날 의정부의 A모텔에서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동네에서 제일 떠벌이로 소문난 변씨 마누라에게 들키고 말았다. 소문은 삽시간에 동네를 발칵 뒤집어 버렸고 그런 어느날 밤 장정구는 문을 잠궈놓고 마누라를 쥐잡듯 두들겨 팼다. 밤이 타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정구 마누라는 악을 바락바락 써댔다.
“이혼하면 될거 아녀. 쌔가 빠지게 일해서 먹고 살만하게 된 게 누구덕이여? 긍께 공장하고 집만 내 앞으로 돌려놓고 땅은 당신이 가지라고요!”
“이년아! 공장이랑 집을 내 놓으라고? 내가 골이 비었냐? 공장에서 달마다 나오는 세가 백만원이 넘는데 그걸 달라고?”
“그럼 땅 다 내놔 이놈아. 누구 덕에 땅 샀냐? 그라고 새끼들도 모두 내가 델고 살끼여, 그래도 안돼? 싫으면 새끼덜 당신이 책임지던지 혀! 그래도 땅은 내놔, 내 땅이여 그건!”
“미친년! 어째서 그게 네 땅이냐? 애덜두 내가 델고 키울꺼고 땅도 집도 하나도 못줘!”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장정구의 아내는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정구는 공장이랑 집을 결국 마누라 앞으로 등기이전 해주고 말았다 했다.
그런 뒤로 장정구는 논바닥 한가운데 비닐하우스를 짓고 홀아비로 살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우연히 김가다는 전철에서 눈에 익은 할머니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장정구의 아내였다. 다리가 몹시 아픈 모양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일어서는 그 할머니를 보고 김가다는 머리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장정구의 아내가 너무도 파삭 망가져 나이가 80은 들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한달쯤 뒤 장정구네 이웃에 살던 박아무개에게 들어본 바에 의하면 장정구의 마누라가 백구두와 도봉동 어디엔가 살림을 차리고 살았는데 장정구에게서 얻어갖고 나온 재산을 몽땅 백구두에게 빼앗기고 아이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사람구실 하는 아들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장정구는 요행으로 갖고 있던 땅이 아파트 부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수십억을 챙겼지만 동두천 B다방에서 우연히 알게 된 여자와 정식으로 혼인신고까지 하고 함께 살았는데 그 여자가 또 남궁원 뺨치듯 잘생긴 희뜩머륵이 남자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장정구는 재산 다 빼앗기고 쪽박 차는 신세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사람이란 참...그토록 부지런하고 단란했던 가족이 백구두란 남자 한사람 때문에 풍비박산이 되어버렸구나, 참으로 안타깝다...”
김가다는 오늘도 장돌뱅이 가방의 손잡이를 소중하게 움켜쥔 채 전철에 올랐다.
“하나님, 장돌뱅이 직업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지존불욕이란 말도 있잖어. 사람이 저마다 분수를 알고 끝까지 맡은 일에 감사하고 현실에 충실하면 장정구네처럼 불행한 일이 없을텐데...10여년 넘도록 뼈빠지게 새벽별 보기운동 하면서 일했으면 뭘해. 종단엔 풍찬노숙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걸...그나저나 그 박씨 물고 온 여자는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남자들한테 살아서들 돌아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니 뭐 6.25전쟁 또 터졌냐, 살아 돌아오라고 허게. 에그...댁두 참 딱허우. 정치하는 사람들두 흥뚱항뚱 말고 그 백구두 조심해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