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㶊庵) 송인(宋寅). 1517년~1584년.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조 작가이자 서예가. 자는 명중(明仲), 시호는 문단(文端). 본관은 여산(礪山). 영의정 질(軼)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지한(之翰), 어머니는 의령 남씨.’
‘문단공(文端公) 탄신 500주년(1517년 7월13일)’을 맞은 9월3일(음력 7월13일) 여산송씨 정가공파 문단공종회 종원 100여명이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소라산 선영에 모여 기념제례를 올리며 뜻깊은 날을 기렸다.
문단공은 10세 때 조선 중종의 3녀인 정순옹주와 혼인하였으며, 선조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1584년(선조 17년) 7월22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인 1635년(인조 12년) 2월 문단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여산송씨 시조로부터 14세손이고 파조인 정가공의 9세손이다.
여산송씨 정가공파 문단공종회 송억근 회장.
이날 기념식에서 문단공종회 송억근 회장(문단공 15세손)은 “신분이 부마(駙馬)였음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마다하고 여민동락(如民同樂)하시고, 당대 최고의 석학들에게도 대우를 받았으며, 명종과 선조로부터 스승의 예우를 받았음은 그분의 인품이 어땠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라며 “그분의 생활정신이야말로 우리 후손들에게 남긴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유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님의 탄신 500주년을 맞아 조상님의 음덕과 얼을 기리게 되어 종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며 “현재 우리의 생활이 바쁘고 또한 조상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선조를 바로 알고 후손들에게도 제대로 알리자”고 했다.
탄신 500주년 기념제례에 맞춰 ‘문단공 이암 소고’라는 책을 엮은 송덕근 편집위원장은 “문단공께서는 당대의 문장가요 시인이요 서예가이며 학자로서 많을 글을 짓고 쓰셨기에 100여권의 저서와 문적과 유묵이 많았으나 1580년 6월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며 “증손인 호성군이 1634년 유고를 모은 <이암집> 한 질이 그나마 전해질 뿐이다. 이암집을 한글로 풀어 후손 누구나가 쉽게 읽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여산송씨 정가공파 숙정공종회 감사인 동두천시의회 송흥석 의원은 “우리 문중과 문단공 할아버님의 위상에 비해 그 공적과 정신을 사회에 제대로 알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선조들의 얼을 기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단공종회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숙정공종회의 지원을 받아 지난 2013년 종회를 설립했으며, 앞으로 이암집 한글번역 등 문단공을 기리는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문단공 신도비각.
◆문단공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것을 문(文), 예를 갖추고 의를 지키는 것을 단(端)이라 하여 이암 송인은 사후에 인조로부터 문단(文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의빈부, 충훈부, 사옹원, 상의원 등 관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이 되었다.
10세 때 정순옹주의 부마로 간택되자 “장부의 뜻을 펼칠 길이 막혔는데 사내로 태어나 호강이나 하며 살면 무엇하느냐?”며 통곡을 하고 사흘 간 식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마가 벼슬을 하여 요직에 있으면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거나 권세를 남용하는 사례가 있어왔기에 이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문단공은 인품이 고아(高雅)하여 이황, 조식, 이이 등과 교유하면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시조도 지었다. 시조는 <청구영언>에 3수, <대동풍아>에 1수가 실려 있다. 산릉의 지(志)와 궁전의 액(額), 사대부의 비갈(碑碣) 등 많은 글과 글씨도 남겼다. 글씨는 오흥의 필법을 받아 해서(楷書)에 능했다.
남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 송지한묘갈, 광주의 좌참찬심광언비, 여주의 김공석묘갈, 남원의 황산대첩비, 부안의 김석옥묘비, 남양의 영상홍언필비 등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