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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암 백인걸 선생 탄생 5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①
양주문화원이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선생 탄생 520주년’을 기념해 양주시와 수원백씨 문경공 휴암종중 후원으로 지난 9월1일 양주회암사지박물관에서 개최한 학술심포지움 강연을 정리한다. 학술심포지움에서는 ▲명종·선조조의 정국과 휴암의 역할 ▲휴암 백인걸의 소차류 정론산문 연구 ▲휴암 백인걸의 철학사상 등의 강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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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緖言)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 선생은 수원백씨 16세손이며, 왕자사부 익견(益堅)공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대사성 김식(金湜)공에게 배웠고, 학문이 깊어지자 대사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댁에 서실을 짓고 스승으로 모시어 수학하였다. 도중에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14, 1519)가 일어나 스승 정암을 비롯 수많은 현량(賢良)들이 참화를 입자 세상을 등지고 한 때 금강산에 들어갔었다.
이후 가산이 빈궁한데다 노모를 봉양할 처지였기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암의 문생(門生)이라 하여 생애 및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휴암의 사환(仕宦) 기간은 둘로 나누어지니, 전반기는 중종 32년(1537) 41세에 급제하여 명종 원년 을사년(1545) 밀지사건으로 파직될 때까지 8년 간이며, 후반기는 명종 20년(1565) 69세로 복관되어 선조 4년(1571) 75세에 치사하기까지 약 6년 간이다.
이렇게 보면 중간에 유배와 파직 기간이 20여년이어서 83세라는 긴 생애에 실직에 있던 기간은 불과 14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휴암이 그처럼 많이 거론되는 까닭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나?
2. 관수자(官守者)의 책무와 치적
휴암이 관수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은, 수령직과 언관직에 재임하였을 때 두드러진 치적을 쌓은 데서 확인된다.
남평현감과 양주목사 재임 시 학교를 일으켜 선비를 기르고, 역사(役事)를 균등히 하며 이서들의 횡포를 제거하고 공물을 감하여 방납의 폐단을 사전에 차단하는 등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는 위민행정을 편 것은, 두 고을의 백성들이 수령의 떠남을 아쉬워하며 부른 노래와 세워진 공덕비에서 확인되고 있다.
언관에 재임할 때는 명종 을사년에 문정왕후의 밀지를 비판하는 직언을 올려 하옥되고 파직되었으며,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인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을 때, 이 때도 역시 휴암은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를 받아들여 몇 달(7개월) 만에 주렴(珠簾)을 거두고 왕에게 정사(政事)를 돌려주었는 바, 여기에서도 휴암이 직언하는 언관의 곧은 절개를 견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3. 정암 문묘종사청원(文廟從祀請願)과 국시귀정(國是歸正)
휴암은 스승 정암이 문묘에 종사되어야 함을 수차례 간곡히 청원하였는 바, 이는 단지 스승을 숭모코자 하는 마음에서 만이 아니었다.
휴암의 문묘종사 청원의 궁극적 의도는, 아마도 문묘종사→신원회복 완결→정암도학의 정체성 획득→국시귀정을 추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곧 정암의 도학사상과 도학정치에 대한 바른 평가로 정암에 대한 일반의 통념과 국론이 바르게 귀착하여 귀일(歸一)되기를 추구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도학회복→사림흥기→왕도정치(王道政治: 至治)의 구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휴암이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시폐개혁(時弊改革)과 지치구현(至治具現)
휴암은 스승 정암이 시폐개혁에 과감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서 스승이 지향하던 왕도정치의 구현이 좌절된 것으로 이해하였으므로, 이를 애석히 여긴 휴암은 스승의 노선을 추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왕에게는 군군신신(君君臣臣) 즉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전제하에, 군주가 먼저 지치(至治)의 의지를 다지며 학문에 주력하고, 절검(節儉)에 솔선하여 조신(朝臣)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동·서로 갈라져 붕당이 형성되어서 서로 반목하고 배척하여 이 때문에 조정에서 공정한 인재거용이 불가능해졌음을 거론하고, 이것은 망국의 화인(禍因)이 되므로 속히 그 폐단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구폐인 일족절린(一族切隣)·진상번중(進上煩重)·공물방납(供物防納)·역사불균(役事不均)·이서주구(吏胥誅求) 등의 폐단을 시급히 척결해야 함을 아뢰었다. 동시에 을사·정미·기유사화의 뒷수습이 20여년 간 미루어졌음을 지적하고 이를 급무로 처리하여 민심의 귀일(歸一)을 도모하여야 지치(至治)의 바탕이 갖추어짐을 역설하였다.
5. 결언(結言): 휴암에 대한 평가와 예우를 겸하여
휴암이 스승 정암에게 도학을 전수받은 기한은 비록 길지 않았으나, 스승에 대한 숭모와 스승의 유지(遺志)를 받들고자 하는 마음은 비할 바 없이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의 도학을 회복하고 이를 조정에서 실행하여 스승의 꿈인 지치(至治)를 이루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특히 출사(出仕)를 통해 궁행 실천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관수자로서 책무를 다하고자 하였고, 둘째 정암 선생을 문묘종사케 하여 도학과 사림을 흥기시키고자 하였으며, 셋째로 시폐개혁을 통해 지치를 구현코자 한 것이다.
휴암이 83세로 서울에서 별세했을 때, 조정에서 2일 간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를 후하게 하며, 관리를 보내어 조문한 것은 역시 휴암에 대한 예우(禮遇)가 각별하였음을 보여주거니와, 치사후인 무인년(82세)에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을 제수하고 기묘년(83세)에 지중추부사를 제수하며 녹미(錄米)를 하사한 것 등은 생전에 예우를 한 바다.
사후에는 선조 신축년(34년, 1601)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면서 승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에 추증되었다. 이후 현종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고 순종 4년에 문경(文敬)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봉산·용주·파산·월암서원 등에서 향사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휴암은 목민관과 언관으로 조신이 사표가 되거니와, 왕실과 군왕의 강력한 왕권(王權)에 맞서 사림(士林)과 조신의 잔약해져가는 신권(臣權)을 지켜서 올바른 군신 관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한 충신(忠臣)이며 청백리로서 오래 기억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