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덮인 부두에 정박 중인 배의 돛대가 세차게 흔들렸다. 오늘도 여객선은 항구를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안에 있는 커피하우스에서 습기 찬 창문을 통해 이를 초조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영국 서부 항구 체스터에서 아일랜드로 가는 여객선이 하루빨리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그의 작품을 초연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바람과 파도에 막혀 중단해야 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루 종일 기다린 그는 일어나 차 값을 지불하고 체스터 항구 커피하우스를 나와 그가 묵고 있는 여인숙으로 돌아갔다. 내일 저녁이면 공연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몰아친 폭풍으로 그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제발 내일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저에게 내려진 가혹한 실패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오니 기적을 베풀어 주세요!” 그는 간절히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기적은 일어났다. 아침에 바람이 잠잠해지고 배는 떠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더블린 피시앰플거리에 있는 극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초만원 관중이 몰려들었다. 극장 측은 100여명을 더 입장시키기 위해 숙녀들이 입은 스커트에 후프를 제거한 후 입장을 허락했고 신사들은 칼을 차지 않아야 했다.
1742년 4월13일. 환호하는 청중을 보며 공연에 임한 그는 마음이 떨려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후 그는 악단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 서곡이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밤잠을 자지 않고 떠오르는 영감 속에 작곡한 곡은 드디어 초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곡이 끝나기도 전에 더블린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평론가들은 극찬을 앞다투어 보냈다. 다음 공연에서는 극장 안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을 모두 떼어낼 정도로 관중은 열광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그 공연으로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실패로 인해 채무 관계에 있던 142명의 빚을 모두 갚고 병원과 진료소에 거금의 자선기금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헨델이고 더블린에서 초연된 음악은 그 유명한 ‘메시아(Messiah)’였다.
헨델은 외과의사이며 이발사인 아버지 고향 독일 할레에서 1685년에 태어났다. 그 당시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하던 시대였다. 헨델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고 법관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음악을 배우겠다는 헨델에게 아버지는 “굶어죽기 딱 좋은 직업이 음악”이라고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헨델의 열정을 말릴 수 없었다.
어린 헨델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한밤 중 다락방에 숨어 달빛을 불빛 삼아 악보를 읽고 연주법을 익혔다. 9세 때 궁정교회에서 오르간을 발견한 헨델은 즉흥 연주를 시작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요한 아돌프 공작이 그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아이가 누구냐?” 헨델의 아버지는 곧 소환되었고 음악 천재를 법률가로 만드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는 공작의 말을 듣고 음악 공부를 허락했다.
헨델은 공부에 뛰어났다. 10대에 할레를 떠나 함부르크로 갔고 다음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작곡법을 배웠다. 20대 중반에 그가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고 큰 연주회를 할만한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는 런던으로 가게 되었다. 1711년 영국 관중을 위한 헨델 최초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가 새로 지은 헤이마켓 극장에서 15일 동안 성황리에 공연되었고 헨델의 이름은 영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13년 평화조약을 축하하는 ‘테디움(TeDeum)’이 세인프 폴 대성당에서 공연된 후 감명받은 앤 여왕은 헨델에게 매년 200파운드의 하사금을 내렸다. 헨델은 오페라 공연 수익까지 더해져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이 버는 작곡가가 되었고 앤 여왕 뒤를 이은 조지 1세는 하사금을 400파운드로 늘렸다. 더 나아가 헨델이 설립한 오페라 회사 왕립음악원에 조지 1세는 수천파운드를 투자했고 이를 따라 런던의 유지들이 앞다투어 투자하는 바람에 헨델은 예술가인 동시에 음악인으로서 세계 최초 최대의 사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10년을 채가지 못했다. 1720년 중반부터 헨델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728년에는 왕립음악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의 자만심과 유행의 변화로 인해 헨델의 이탈리아어 오페라는 몰락하게 되었고 1937년 그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중풍이 오면서 오른쪽 손가락 네 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헨델의 시대는 끝났다. 그의 영감은 고갈되었고 그의 감각은 유행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고 신문은 혹평하였고 그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1741년 그의 나이 56세. 오페라를 포기하고 실의의 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후원자였고 시인인 찰스 제넨스가 양피지로 싼 대본 하나를 보내왔다. 그 대본은 성경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인용해 예수의 탄생·수난·죽음·부활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대본이었다. 헨델은 이 대본을 읽고 말할 수 없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숨을 쉬듯 곡을 쓰기 시작해서 23일 만에 곡을 완성하였다. 그 곡의 이름을 ‘메시아’라고 붙였다. 이 곡은 그에게 돈보다 휠씬 더 귀중한 가치와 의미를 가져다주었고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헨델은 그의 말년 10년 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메시아에 집중해서 매년 자선공연을 열었고 영국 왕 조지 2세는 할렐루야 대합창이 시작되자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청중이 술렁이면서 비단 옷을 입고 검을 찬 신사 숙녀들이 모두 따라 일어섰다.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 할렐루야가 울려 퍼지면 영어권 세계의 청중은 모두 일어서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말년에 헨델은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더블린 공연 이후 꼭 17년이 되는 1759년 4월13일 새벽에 눈을 감았다. 그의 자만심은 그를 절망의 나락을 추락시켰으나 그는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끈기 있게 전진해 다시 음악의 어머니라는 불멸의 명예를 회복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서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웃는 한 희망은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웃음은 희망의 최후 무기이다”라는 하비콕스의 말을 마음 속에 다시 한 번 새겨본다.
하하 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