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은 조선 첫 폐세자라는 불명예를 가진 인물이다. 조선 통치체제의 기틀을 만든 태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조선 왕조 첫 장자 상속원칙을 세울 수 있었으나 각종 악행과 성추문 사건으로 왕세자의 자리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양녕대군이 태종과 세조 시절에 보여준 왕권강화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양녕은 세자 시절 부왕인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외삼촌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태종은 제1~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 형제들이 차기 대권주자인 양녕대군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권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철퇴를 내려 죽음으로 내몬다.
양녕은 태종의 철저한 정적 제거를 지켜보면서 왕위계승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양녕이 왕위를 포기한 이유 중에 처절한 권력투쟁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노쇠한 양녕은 변했다. 자신의 조카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하자 권력의 화신으로 변신한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3년 10월19일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전일에 노산군(魯山君) 및 이유(李瑜) 등의 죄를 청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청한다.
세조가 이를 윤허하지 않자, “대역(大逆)과 같이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은, 상량(商量)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소서”라고 거듭 재촉한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자신의 손자뻘인데도 왕권강화를 위해 처벌을 재촉하는 비정한 종친의 모습을 보였다. 양녕의 이중적 처신은 권력은 절대로 공유할 수 없다는 역사적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