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후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불운의 군주다. 일설에는 신라말 왕위쟁탈전의 희생양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몰락한 왕족의 후예인 궁예에게 기회가 왔다. 신라말 희대의 악녀인 진성여왕은 향락에 빠져 민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압적인 수취에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었고, 농민반란도 빈발했다.
궁예는 불교에 귀의한 신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원이 기반인 양길의 부하로 무공을 세웠다. 양길은 포악한 성격으로 부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반면 궁예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러 온 미륵부처와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양길의 부하들은 궁예를 선택했다. 궁예는 송악과 황해도 일대의 호족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901년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그는 한반도 중북부를 장악하고 삼한통일의 대업에 나섰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전국의 인재들이 궁예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후일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 명장들도 궁예를 따랐다. 가히 난적 후백제의 견훤과 자웅을 겨룰 만했다.
하지만 궁예는 초심을 잃기 시작했다. 자신을 미륵부처로 칭하며 반대파를 무참하게 숙청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의 왕후와 두 명의 왕자들도 처참하게 죽였다.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다.
민심은 새로운 군주를 원했다. 시대의 요청을 읽은 왕건과 그 휘하 장군들은 궁예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궁예는 왕건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의 공천작업이 마무리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공천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혹시라도 초심을 잃은 공천권자들이 공천(公薦)이 아닌 사천(私薦)을 행한다면 본인의 사천(死薦)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초심을 잃은 궁예의 최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