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해년(己亥年)의 해가 밝아왔다. 힘든 지난해를 보낸 사람들은 새해에는 부디 좋은 일만 생기기를, 더 큰 소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특히 새해는 돼지의 해가 아니던가.
사람들은 재산과 복의 근원으로 여기며 돼지꿈을 꾸기 바라고, 좋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여서 삼겹살을 먹음직스럽게 굽고, 아이들에게는 돼지저금통을 마련해주고,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여기면서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고사에도 돼지를 올린다.
반면 돼지를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우둔한 동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인식하는 돼지의 양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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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희생물이자 번성의 상징
12간지의 마지막인 돼지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로부터 돝, 도야지, 돈(豚), 저(猪), 시(豕), 체(彘), 해(亥) 등으로 불리면서 제전에 바친 제물로 희생된 대표적인 동물이다.
삼국사기, 동국세시기 등에서도 돼지를 제전의 제물로 바치면서 신성시 했는데, 산신제, 고사, 큰 굿뿐만 아니라 부귀영화를 기원하면서 돼지머리를 제물로 올리고 있다. 토속신앙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다리 등의 건설 기공식뿐만 아니라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 차를 샀을 때도 번성을 기원하며 돼지머리를 올린다.
이는 강한 번식력과 다산을 하는 돼지의 특징처럼 일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벌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상인들이 ‘정월상해일’에 문을 열고 돼지그림을 거는 풍속도 여기서 연유했다. 이러한 특징은 외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돼지는 풍요를 비는 제물이었다.
그런데 왜 돼지였을까? 경남 합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에 왕이 잔치를 위해 소를 잡으려하자 소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 죽으면 안 된다고 했다. 개를 잡으려하자 도둑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고양이는 쥐를 잡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돼지는 평소에 하는 일이 없어 아무 말도 못했다. 이 때부터 잔치를 하면 돼지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돼지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농사의 대부분을 책임지던 집안의 큰 재산인 소를 잡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서민들 입장에서는 값비싼 소 보다는 그럭저럭 구하기 쉬운 돼지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길상의 동물이자 복의 근원
<고려사>에 전해지는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에 대한 이야기에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돼지가 등장한다. 작제건이 용왕을 도운 보답으로 용왕의 딸과 돼지를 얻는데, 돼지가 안내한 송악산 남쪽에 터를 잡는다. 이후 용왕의 딸이 용건을 낳고, 용건이 낳은 아들이 왕건이다.
돼지는 많은 동물 가운데 길상의 동물로 여기고, 재산이나 복의 근원인 ‘업’, 집안의 재신을 상징하는데, 전라도 지방에 전해지는 ‘업돼지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집주인 눈에만 보이는 돼지가 집에 들어오자, 10년 만에 천석 갑부가 되고 벼슬도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돼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주인은 곧 망할 것이라 탄식하고 있는데, 돼지가 엽총꾼들을 유인해 와서 하룻밤 묵게 했다. 그날 밤 떼강도가 들이닥쳤는데, 엽총꾼들이 물리쳐 그 집안을 보호해 주었다. 이 설화를 보면 돼지는 집안의 부를 가져다주는 것뿐만 아니라 지켜주는 재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속설 때문인지 돼지꿈을 꾸면 복이 오고 재수가 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산다. 이렇듯 돼지를 돈과 연결시키는 것은 돼지가 4개월의 짧은 임신 기간에 비해 10여마리씩 새끼를 낳는 다산의 특성 때문도 있고, 한편으로는 한자 음 ‘돈(豚)’이 한글로 화폐를 의미하는 돈과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
항상 굶기지 않고 편안하게 보살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려고 웃는 얼굴로 죽어서 고사를 지낼 때 복을 준다는 돼지의 의리가 이토록 큰데, 게으르고 고약한 사람을 향해 ‘돼지 같다’고 욕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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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속 돼지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보면 최치원이 금돼지의 자식이라 짐승들도 덤비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여러 지역에서 전승된다.
충북 보은 구병산에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금돼지가 있는데, 마을을 보살펴주는 산신령이라고 하여 음력 1월14일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경남 창원에는 돼지가 누워있는 모양의 돗섬이 유명한데, 옛날에 왕이 굉장한 미녀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데려 오라고 했는데, 그 미녀가 금돼지로 변하여 섬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무안군에 사는 사람이 돼지고기를 사가지고 언덕을 넘는데 뒤에서 “쫌쫌”하면서 따라와서 고기를 던져버리고 도망쳤다. 다음날 가보니 고기는 그대로 있는데, 도깨비가 먹은 것이라 맛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도깨비가 돼지고기를 좋아해서 밤에 가지고 다녔다가는 빼앗긴다는 이야기는 전남 강진, 장흥, 담양, 순천, 완도 등 전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해진다.
#지혜로 지켜야 할 부귀의 신
옛날 궁중에서는 풍년을 비는 뜻으로 ‘해낭’이라는 주머니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관들이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주둥이 지진다’하며 돌아다녔다. 힘들게 찾아온 재물과 복이지만 가만히 두면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버린다. 지혜롭게 다스리지 못하면 언젠가 순식간에 집 밖으로 나가버린다.
불국사 극락전에는 극락세계의 돼지가 현판 뒤 꽁꽁 숨어 있는데, 사람들은 돼지상을 찾으면 복이 온다고 믿는다.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극락정토의 돼지는 부와 귀의 상징인 동시에 지혜로움으로 부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