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조선의 주체세력인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삼아 위로는 임금, 아래로는 백성까지 성리학적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특히 국상(國喪) 중에 음주, 기생과의 유희를 즐기는 사대부와 관리는 엄벌에 처했다. <태종실록> 태종 8년 7월26일 기사는 “국상 중에 주연을 벌인 대호군 조정을 파직하다”고 전한다.
실록에 따르면 “대호군(大護軍) 조정(趙定)을 파직(罷職)시켰다. 조정이 국상(國喪)을 당해 술과 고기를 싸가지고 회음(會飮)했으므로, 헌부(憲府)에서 그 죄를 논(論)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만약 대호군 조정이 국상 기간이 아니었다면 파직까지 당하진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조선의 관리들은 태종의 의지를 제대로 읽지 못한 모양이다. 조정이 파직된지 불과 2년도 안 지난 시기에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번엔 기생까지 불러다 즐긴 관리가 적발됐다.
<태종실록> 태종 10년 4월2일 기사는 “국상이 난지 3년 안인데 기생을 불러 놓고 관청 안에서 술을 마신 호조 정랑 허반석 등을 파직시키다”라고 기록했다. 정랑이라는 관직은 호조의 실무를 관장해 요직으로 인정받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허반석 등은 국상 기간 중에도 술과 기생을 잊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켰다. 앞길 창창한 젊은 관리들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조선의 대간은 관리들의 몸가짐에 대해 “공경(公卿)은 사(私)를 잊고, 국상(國相)은 집을 잊고 처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혹시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 나라를 그르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국상(國喪) 중 관리의 부적절한 처신을 일벌백계로 다스린 것이다. 태종의 단호한 의지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기강은 이렇게 잡는 것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