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소년’이 어느덧 중년이 되어 어린 시절 꿈을 키우던 고향 면장으로 금년 7월 부임했다.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고, 나를 반기는 고향 분들이 있어 마음이 푸근했다. 또한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면장으로 근무하게 되어 조금이나마 자식을 낳아 키운 보람을 안겨드리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에 쌓아 두었던 성취감도 숨길 수 없었다.
이런 생각과 마음의 여유도 잠시,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왔는데 이제는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점점 건강이 쇠퇴해지시는 아버님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모시고 다녀도 병색은 호전되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은 왜 이리 잘 맞는지. “현대의학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아버님을 위해 자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는 편안하게 모시는 방법 밖에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마음 한 켠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병환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살아계시는 동안 많이 아프시지 말고 편안하게 세상과 이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아버님을 뵙는 것이 죄송하고 안타까운 생각만 들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답답하여 지인에게 가정사를 얘기하니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도 자식은 후회가 많다. 그래도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이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가을이 깊어지는 지난 10월, 병환이 중해지시던 아버님이 어느 날 새벽에 병원을 가자고 하셨다. 왜 그러시냐고 하니 병간호하는 가족들 고생시키는 것 같으니 병원 가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어머님께 손주 결혼식 때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모습에 이제 집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 눈물이 핑 돌았다. 병원에 입원시켜드리고 매일 찾아가서 뵐 때까지 환한 미소와 농담까지 섞으며 자식 걱정을 하시던 아버님이 입원한지 7일째 되던 날 새벽. 위독하시다는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뛰어갔으나, 편안하게 눈을 감고 운명하신 아버님의 귀에 대고 나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을 입관할 때 ‘살아 생전 내가 그렇게 속 썩이지 않았다면’, ‘외로워 보이던 손을 한 번 더 잡아드렸다면’, ‘나이 들어가며 작게만 보였던 어깨를 안아드렸다면’, ‘자식 키우느라 힘드셨을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어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상여에 모시고 마을 길을 나설 때 상여소리는 왜 그리 슬프고 애절한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화장터를 통과하며 헤어질 때는 “아버님, 안녕히 가십시오”라며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다. 빈 손 들고 왔다가 빈 손 들고 가는 인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뭔가를 움켜쥐겠다고 주먹 꽉 쥐고 나오지만 떠날 때는 모두 돌려주고 두 손 펴고 돌아간다.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해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잠깐 빌려 쓰는 것에 불과하다. 삶을 다하고 돌아갈 때에는 남김 없이 돌려주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두 손 펴고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런 교훈을 주고 떠나신 것 같다.
“아버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