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전소설 중에 군담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 <유충렬전>, <임진록>, <박씨전> 등이 대표작이다. 이 소설들은 임진·정유전쟁과 정묘·병자전쟁을 시대 배경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을 강타한 양대 전쟁은 무능한 군왕과 비겁한 지배층의 분열이 빚어낸 참극이다. 하지만 전쟁 책임자들은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 보신에만 급급했다. 심지어 선조는 조선과 백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귀부할 생각에 몰두했고, 인조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고자 삼전도의 치욕도 감수하며 수십만명의 백성을 적국에 갖다 바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담소설도 당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작자 미상이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몸으로 겪은 백성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현실과 정반대인 소설의 결말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 전쟁은 우리의 패배로 귀결됐지만, 이들 소설은 가상의 영웅의 극적인 출현과 눈부신 활약으로 우리의 승리라는 해피엔딩을 창조했다.
백성들은 비겁하고 무능한 군주와 간신들이 백성을 버린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았다. 집권층의 위선과 부패가 자신들을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만든 원흉임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간파한 ‘작자 미상’은 백성의 한(恨)을 소설로 풀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록>에서 사명대사가 도술을 부려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왜란 당시 우리 백성의 피맺힌 한을 실감케 한다. 아울러 항왜 원조라는 미명 하에 조선에 파병된 이여송의 행패를 질타하는 모습도 약소국의 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박씨전>은 정묘·병자전쟁의 주범인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다. 조선의 지배층은 남자라는 이유로 온갖 특혜를 누렸지만, 정작 전쟁이 터지자 백성도 버리고 가족도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 보신에만 급급했다. 심지어 인질로 끌려갔다 귀향한 불쌍한 여인들을 환향녀라고 멸시하는 배신의 정점에 선 자들이 조선의 남정네들이었다.
하지만 주인공 박씨 부인은 의연히 청군을 능수능란하게 물리치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제시했다. 외부의 적보다 더 위험한 봉건적 인습이 박씨 부인의 활약으로 한 순간에 무너지는 장면에 조선 여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영웅이 실종됐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자신을 영웅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안보는 위태롭고 기업과 인재는 한국을 떠나고 있다. 위기 속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다. 이 정도는 아직 대한민국의 위기가 아닌가 보다. 군담소설이 나올 때가 된 듯하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