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패션산업도 매우 발전하여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특히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으로 대별되는 저렴하고도 유니크한 패션은 중국 및 동남아뿐 아니라 러시아와 유럽으로도 진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짧은 시기에 우리나라 패션산업이 업그레이드된 것은 패션 선각자들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다. 여기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인 노라노 여사의 열정적인 삶을 조명해본다.
가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1960년대 초 쇼킹할 정도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펄시스터스의 판탈롱 바지 또한 한 시대 유행을 몰고 왔다. 육영수 여사의 단아한 의상도 많은 이들의 표본이 됐다. 이 모두를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노라노이다. 그녀는 1928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노명자.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한 후 영어를 배워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의 영어교사를 지냈고 그녀의 어머니는 조선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이다.
꿈 많은 문학소녀 노라노는 경기여고 시절 일본 유학을 준비했지만 1944년 세계대전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며 유학이 전면 금지됐다. 당시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전쟁에 끌려나갔으며 여학생들은 군수공장이나 정신대로 끌려나가야 할 처지였다. 그렇지만 시집을 가면 일단 징집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그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일본 육사에 입학한 생도였고 일본 도쿄 부근에서 잠시 신접살림을 했지만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 후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2년 후 전쟁터에서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으나 그 당시론 파격적인 이혼을 감수하고 미국행 유학길에 올랐다.
1947년 채 20세가 안 된 앳된 이혼녀 노라노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폭격기를 개조한 노스웨스트 항공사 여객기였다. 그녀는 해방 후 성악가 김자경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행 비행기를 탄 여성이었다. 노명자는 여권 이름을 노라노라고 바꿨다.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따왔다. 주인공인 노라가 집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듯 자신도 노라노라는 새 이름을 갖고 새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는 미국 프랭크 왜곤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패션디자인 공부를 했는데, 비싼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유학 도중 갑자기 한국의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고 모든 살림살이가 차압당하는 연락을 받은 노라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둘러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살던 집 2층 조그만 방에서 의상실을 시작한 그녀는 미국에서 배운 참신한 디자인 감각으로 세간의 이름을 얻기 시작하여 드디어 국내 최고 상권인 명동에 ‘노라노의 집’을 차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혼란기에서도 착실하게 유학자금을 모아 1954년 26세 되던 해 패션의 본 고장인 프랑스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 스쿨에서 못다한 패션공부를 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귀국한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다.
그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단을 사용하여 의상을 디자인했다.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으로 한국 섬유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 당시 유명배우인 최은희, 엄앵란, 김지미, 조미령 등이 노라노의 옷을 입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녀는 명품 맞춤옷만 고집하지 않고 1966년 기성복 패션쇼도 열어 기성복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처음으로 마음대로 입어보고 고르는 기성복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1970년부터 73년까지 노라노는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참가했고 1974년에는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노라노는 1977년 예림양행을 설립해 뉴욕, 홍콩, 일본으로 진출했고, 1980년대는 패션중심가인 뉴욕 7번가에서 10여년간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했다. 2000년에 세계 패션그룹 패션대상을 수상했고, 2015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한 그녀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영원한 현역으로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영화배우 엄앵란씨는 노라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의 샤넬이다. 의상의 선구자다. 내가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노라노 선생님이 옷을 잘해줘서 톱스타가 되었다라고 나의 외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노라노는 일생을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일평생 일하면서 큰 뜻을 이루거나 어떤 대가를 바란 적이 없어요. 그냥 매번 도전으로 생각했어요. 한 번 해보는 거죠. 재미있잖아요. 해내면 기쁜 일이고 못하면 할 수 없구요. 그런데 경험상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한 단계씩 올려 주더군요.”
늘 희망을 갖고 도전하며 실패를 개의치 않고 성공에 기뻐하는 그녀는 진정한 개척자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만의 길을 꾸준히 개척하는 삶은 아름답다. 오늘도 한껏 웃음으로 팔 벌려 나의 삶을 받아들이자. 웃다보면 숨겨진 열정이 되살아나고 삶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하하 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