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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우/미디어오늘 논설실장 |
김형오 국회의장이 미디어관련법, 즉 언론악법의 직권상정을 발동할 것인가? 만약 그가 언론악법에 국회의장의 비상대권인 직권상정을 발동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직권남용이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은 엿장수 마음대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은 국회법 제85조 1, 2항의 국회의장 직권상정권 규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국회법 제85조 2항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에 대해 엄격한 단서를 달고 있다. 즉 “위원회가 이유 없이 (의장이 지정한) 심사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만 직권상정을 발동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해당 상임위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직무를 유기한 사실이 명백한 경우에 국한한다는 것을 명기한 것이다. 그러면 현재 언론악법이 ‘이유 없이’ 해당 상임위에서 심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나라당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압박하면서 정상적인 법안 심사를 거부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희의장의 직권상정만을 공언하면서 언론악법에 대한 최종 수정안에 대한 공개도 거부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이런 비상식적인 태도는 언론악법에 대한 정당간의 심사를 거부하는 반의회주의적 작태다. 이런 태도는 국회를 마비시키시는 행위로, 직권상정의 필요조건인 “이유 없이 심사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 정면 배치된다. 즉 언론악법은 심각한 이유로 심사가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국회의장이 언론악법의 직권상정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직권남용이다.
한나라당은 언론악법에 대한 정상적인 여론 수렴절차도 거치지 않고 국회 상정을 시도한 후 이번에는 직권상정을 외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해 같은 당 국회의원에게조차 법안에 대해 알리지 않았고 관련 공청회 한번 제대로 열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악법의 국회 통과를 시도했다. 언론악법은 국민의 알권리, 언론의 알릴 의무와 그 권리에 대한 시장 구조를 바꾸는 중차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법은 당연히 신중한 여론 수렴절차를 거쳐야 했다.
한나라당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이상 임기동안은 국민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으니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 이는 시대정신에 도전하는 매우 부적절한 정치적 태도다.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정치는 권력투쟁의 정치다. 이는 대의민주주의의 한 과정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사회적 논의를 일상화하는 진보된 정치형태인 협치(governance)에는 등을 돌리는 시대착오적 태도다.
지난해의 촛불, 올해의 서거 및 시국 정국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시민사회는 대의민주주의의 배타적이고 지극히 관료화된 태도에 분노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민사회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을 기회만 있으면 표출하고 있다. 김형오 의장은 국회의 수장으로써 이런 사회적 요구를 직시해야 한다.
국희의장의 직권상정은 엄연히 의장의 권한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자기 호주머니 속의 카드인양 언급하는 것은 해괴하기 짝이 없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인가, 아니면 김 의장이 만만해서 그런 것인가? 한나라당의 직권상정 압박은 김 의장에 대한 도발행위다. 이런 불상사는 당사자인 국회의장이 준엄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국회의장이 적절한 조치 없이 방관하는 것도 큰 문제다. 민주주의는 공직자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소임과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으면 지켜지기 어렵다.
김 의장은 제왕적 대통령을 지적하면서 개헌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헌법기관이나 권력기구 등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는 한, 개헌만 해야 민주주의는 오지 않는다. 검찰이나 경찰이 스스로 법을 지키지 않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갈 길이 멀다. 모든 헌법기관이나 권력기구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민에게 최대한의 입법, 사법, 행정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진다면 검찰총장 내정자가 낙마했다 해서 그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정보 출처를 검찰이 내사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짓이 벌어질 수 없다. 국민에 대한 법률 서비스를 하는 것이 검찰의 존재 의의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면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김형오 국회의장도 개헌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눈앞의 중차대한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여야가 본회의장 ‘동시 농성’이란 초유의 대치를 벌이는 것은 김 의장이 직권상정에 대한 명백한 소신을 밝히지 않은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김 의장이 수차례 여야 원내대표 간 협상을 중재하고, ‘회기 연장’ 제안까지 했지만 이런 노력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직권상정만이 유일한 카드인양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언론악법에 대한 여론조사조차 거부하면서 표결처리만을 주장하는 등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외면, 파괴해왔다. 이런 상황을 김 의장은 직시하고 민주주의 역사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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